섬유 유연제 향이 나지 않아

사원 시무 이야기 6

by 이리

나 오늘 일찍 끝나는데…

체크 선배의 문자였다.

뭐야, 내가 연락할 때는 답이 없더니.

하는 생각과는 반대로 시무의 손은 멋대로 답장을 보냈다.

퇴근하고 만나요.

선배 회사가 을지로입구 쪽이죠?

제가 교보문고로 갈게요.

그럴래?

선배는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퇴근 준비는 다섯 시 반부터 시작했다.

미안해. 난 좀 늦을 것 같아.

괜찮아요. 들어가서 책 좀 보고 있으면 돼요.


교보문고에는 오랫만에 왔다.

어딘가 갈 곳이 없으면 여기에 오곤 했다.

막상 출판사의 직원이 되고 나서 와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무언가 부끄럽기도 했고, 회사 일의 연장 같기도 했다.


시무가 작업한 해외 그림책 코너 앞에는 아이와 함께 온 주부가 몇몇 있었고,

혼자 온 20-30대 여성이 두 명 정도 있었다.

<노래하는 할아버지>

컴퓨터 속에 있던 파일이 인쇄를 하고 제본을 거쳐 멀고 먼 길을 건너

다시 시무의 손 위에 펼쳐졌다.

표지에는 ‘칼데콧상 수상작’이라는 금빛 트로피 모양이 터무니없이 크게 들어가 있다.

“이거 사이즈 좀 키워야지. 시무 씨.”

사장은 주간 회의 때 지적했다.

“요즘 기본적인 건 다 학교에서 배우고 오지 않나...”


노래하는 할아버지를 잠깐 들었다가 다시 매대에 놓았다.

자신의 첫 작업을 선배에게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약속 시간이 다 되어 서점 정문 밖으로 나왔다.


체크 선배는 더 이상 체크셔츠를 입지 않았다.

오늘은 감색 반팔 셔츠 위에 남색 슈트를 위아래로 걸치고 검은색 컨버스 하이를 신었다.

걸어오느라 더웠는지 재킷을 벗어 팔뚝에 걸친 모습이다.

왠지 어른 같잖아.

시무는 건물 유리에 비친 자신을 모습을 보았다.

스트라이프 보트 넥 셔츠와 바지, 가방 모두 대학 때 입던 것이다.

새로 산 것은 아이팟 하나뿐.


덥다, 잠깐 앉자.

선배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어제 만난 사이처럼 자연스럽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이 모습에 반했었지. 모든 게 능숙한 사람이라서.

둘은 교보문고 앞에 있는 나무로 만든 커다란 계단식 의자에 앉았다.

시무가 앉으려는 순간 선배가 바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깔아주었다.

어떻게 지냈어?

시무는 최근에 아이팟을 샀다고 말을 꺼냈고,

선배는 자신도 사고 싶었노라고 맞장구쳐 주었다.

같이 듣자.

각자 이어폰 한쪽씩 나눠 끼고 같은 노래를 들었다.

끈 길이가 짧았는지 선배가 5cm쯤 다가와 앉았다. 그리고 다시 2cm쯤 더 들어왔다.

몸을 움직이면서 바람을 일으키며 향수 냄새가 넘어왔다.

선배, 요즘 바쁜가 봐요. (연락도 안되고...)

응 여자 친구 생겨서 그런가?

시무는 얼어버렸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래도 너 같은 동생 있어서 이렇게 얼굴 보니까 좋다.


어디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은 곳에서 저녁을 먹고 커피도 한잔하고 집으로 도망쳤다.

선배에게선 더 이상 섬유 유연제 향이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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