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과 후퇴

by 이리

'만들고 있는 책'이 있다. 작업은 이렇게 진행한다. 책의 주제를 한 문장으로 만들어보고 열 문장으로도 만들어보고 괜찮다 싶으면 쭉쭉 글로 써본다. 어제의 글을 수정하여 구글 문서에 새로 저장한다. 글을 보고 스토리보드용 스케치를 만든다. 스케치하면서 다시 글을 수정한다. 글을 수정하면서 그림의 진도가 나가지 않는 것이다. 이른바 버뮤다 삼각지대다. 스케치까지 했으니 한 발 전진한 것인가 싶지만, 글을 수정해야 하니 그렸던 스케치도 또 바꿔야 한다. 이것은 두 발 후퇴한 게 아닐까.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다 보면 내가 어디까지 와있는지 헷갈린다. 그러다 보니 오늘처럼 '에라 모르겠다 싶은 날'이 도래한다. 해서 잠이나 실컷 자고 싶다. 침대에 누우니 춥다. 이 집은 베란다는 남향인데 침실 방은 북향이다. 매트리스 위에 전기장판을 켰다. 작업을 하려면 책상에 앉아야 한다. 나는 책상에 앉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있다. 지척에 있어도 못 간다.
30분만 자야지... 일어나 보니 한 시간 반이 지나있다. 시계는 벌써 오후 다섯 시 반. 더 이상 여기 있으면 안 돼! 머리털이 삐죽삐죽 솟구친다. 얼른 집 밖으로 튀어나왔다. 자전거에 올라타 몇 바퀴 돌리다가 비를 몇 방울 맞았다. 쿨쿨 자던 나베가 내가 들어오는 소리에 깨어 운다. 애써 모른 척하고 자전거를 집에 세워놓고 우산을 챙겨 집 밖으로 도망친다. cj 택배차가 옆집 앞에 세워져 있다. 길에는 퇴근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시간에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은 나 정도일까?

비가 올 듯 말 듯한 날씨에 카페 창가에 앉아 업무 메일을 몇 개 쓴다. 어쩐지 누군가에게 메일을 쓰고 나니 마음이 안정된다. 누군가와 연결된 기분이 든다. 할 일을 다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꼼짝없이 앉아 '만들고 있던 책'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전진일까.

작가의 이전글<언젠가 나올 이야기> 속 캐릭터 설정 -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