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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리터러시는 늘 비판을 말할까?

리터러시 인사이트 11화

by 시뮬라크르

비판, 리터러시를 위한 역량


몇 년 전에 필자는 대학생들과 전문가들에게 미디어 리터러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물었었습니다. 가장 많은 응답은 ‘비판’이었습니다. 이해, 활용, 참여, 제작 등 다양한 의견이 있었지만, 필자도 비판을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리터러시는 비판을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이는 ‘리터러시’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개념 모두에 해당합니다.


미디어 리터러시는 미디어에 나타나는 사실과 허구를 읽어내는 역량이고, 디지털 리터러시는 인터넷에서 올바른 정보를 찾고 분석하는 능력입니다. 헬스 리터러시는 근거 없는 건강정보를 가려낼 힘이며, 비주얼 리터러시는 편집된 이미지 속 사회·문화적 맥락을 읽어낼 눈입니다. 주제는 다르지만, 모든 리터러시는 비판을 바탕으로 합니다.


인터넷에는 ‘이게 맞나?’ 싶은 온갖 정보가 있습니다. 틀린 게 아닌지 의심해보는 자체가 다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이제는 AI가 사진과 영상을 진짜처럼 만듭니다. 정보의 진위를 가려야 할 상황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제 정보를 그냥 보는 게 아닌, 숨어 있는 의미도 읽어내야 합니다. 비판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리터러시가 단지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실제로 코로나 팬데믹 당시 가짜 정보가 확산하는 ‘인포데믹’(infodemic) 현상을 겪었습니다. 알고리즘이 만든 뉴스 추천은 ‘필터 버블’로 좋아할 내용만 보게 만듭니다. 블로그의 생활상식이 교묘한 광고이기도 하고, AI는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흐리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image01.png 리터러시라는 개념에는 늘 비판이 함께하며, 비판을 통해 리터러시 역량을 높일 수 있다. (이미지=챗GPT5로 생성)


리터러시를 위한 다양한 비판의 관점들


비판과 부정은 다릅니다. 비판은 생산적인 힘이지만, 부정은 닫힌 태도입니다. 비판을 뜻하는 영어의 어근 ‘crit-’은 그리스어 ‘krinein’(가르다, 구분하다, 판단하다)에서 비롯됐습니다. 비판은 헐뜯는 행위가 아니라, 무엇을 받아들이고 거부할지 가려내는 역량입니다.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우리가 사는 시대는 비판의 시대이며, 모든 것은 비판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칸트에게 비판은 이성이 스스로 법정을 세워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과정이었습니다. 오늘날 역시 리터러시를 통한 ‘비판의 법정’을 세워야 합니다.


교육학자 파울루 프레이리(Paulo Freire)는 <페다고지>에서 “비판적 사고란 세계와 보이지 않는 연대감을 인식하고, 현실을 정태적인 실체가 아니라 과정과 변화로서 파악하는 사고”라고 했습니다. 그에게 비판이란 피억압자가 권력의 질서를 넘어설 힘이었습니다. 지금 역시 우리는 정보 이면에 가려진 의도와 권력을 읽어내야 합니다. ‘그렇구나’가 아닌, ‘왜?’라고 비판해야 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리터러시입니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시장터의 파리들에 대하여」라는 글을 통해 군중을 ‘파리떼’에 비유했습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떠들며 남을 깎아내리고,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다고 말합니다. “자주 상냥한 얼굴을 하고” 말입니다. 니체는 군중의 평가와 인정 욕구에 벗어나 스스로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오늘의 SNS는 시장터와 다름없습니다. 정보와 평가의 소음에 휘둘립니다. 리터러시는 이러한 소음을 가려내는 힘이고, 비판은 그 핵심 도구입니다.


리터러시에서 말하는 비판은 단지 의심하거나 반박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맥락을 이해하고, 숨은 의도를 밝히며, 스스로 판단하는 힘입니다. 비판은 우리를 수동적 수용자에서 능동적 해석자이자 참여자로 만듭니다. 더 넓게는 디지털 윤리와 시민성의 기반이 됩니다. 칸트가 말했듯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힘이고, 프레이리처럼 변화의 출발점이며, 니체가 말했듯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창조할 방법입니다.


새로운 리터러시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AI 리터러시, 환경 리터러시처럼. 그러나 그 바탕에는 비판이 언제나 있습니다. 리터러시는 끝없는 바다, 비판은 나침반입니다.



참고문헌


Freire, P. (2018). Pedagogy of The Oppressed: 50th Anniversary Edition. 남경태·허진(역) (2024). <페다고지>. 서울: 그린비.


Kant, I. (1781). Kritil Der Reinen Vernunft. 정명오(역) (2024). <순수이성비판>. 서울: 동서문화사.


Nietzsche, F. (1968). Nietzsche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 vol. Ⅵ 1: Also sprach


Zarathustra). 정동호(역) (2014). <니체 전집(KGW) Ⅵ 1(13)):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울: 책세상.


*이 글은 ‘디지털포용뉴스’에 기고한 칼럼을 수정하였습니다.

https://www.dginclusion.com/news/articleView.html?idxno=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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