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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를 멈춘 사람들, 눈 감은 디지털 세상

리터러시 인사이트 10화

by 시뮬라크르

평범한 얼굴로 다가온 악


“중간 정도 체격에 호리호리하며 중년으로, 근시에다 희끗희끗한 머리와 고르지 않은 치아를 지니고 있었다.”


정치이론철학자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밝힌 한 사람의 첫인상입니다. 이는 나치 전범 ‘루돌프 아이히만’으로, 유대인 학살의 핵심 관료였습니다. 세간에는 악의 상징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단어 그대로 평범한 중년 남자였습니다.


1960년, 이스라엘 정보기관(모사드)은 아르헨티나에서 아이히만을 납치해 예루살렘으로 강제 압송했고, 나치 전범 피고인으로 공개재판에 앉혔습니다. 이 재판을 지켜본 아렌트는 이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저서를 통해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악의 평범성'이란 무엇일까요? 괴물일 것 같던 아이히만은 단어 그대로 평범했습니다. 이스라엘 정신과 의사들을 아이히만을 지극히 정상이라고 판정했습니다. 그에게는 유대인에 대한 광적인 증오, 반유대주의, 세뇌 그 어느 것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왜?’라는 의문만 남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본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말하는 데 무능력(inability to speak), 생각하는 데 무능력(inability to think)”이라고 평가하며, “사유의 진정한 불능성”이라고 선언합니다. 쉽게 설명하면, 아이히만은 그저 한때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었으므로 그러한 반인류적 범죄를 수행했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사형장에서도 장례식장에 흔히 쓸 수 있는 뻔한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합니다. 자기 장례식이라는 것을 잊은 채로.


아이히만 재판.png 1961년 예루살렘에서 재판 중 메모를 하는 피고 아돌프 아이히만. (출처: 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ko/photo/defendant


디지털 시대의 아이히만


아이히만 판결 후 60년 이상 흘렀습니다. 범죄의 형식은 다르지만, 우리는 지금도 그 구조를 닮은 ‘악의 평범성’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특별한 소수의 문제가 아닌, 모두가 가질 가능성으로 봤습니다. 지금, 누구든 인터넷에서 활동할 수 있습니다. 생각을 멈춘 평범한 어떤 사람도 디지털 세계의 ‘악’을 가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경찰청이 발표한 <2023 사이버범죄 트렌드>에 따르면, 2018년부터 5년간 전체 사이버범죄 건수가 꾸준히 상승세인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이는 한국뿐만이 아닌 전 세계적 추세입니다. 세계경제포럼(WEF)의 <Global Cybersecurity Outlook 2025>에서도 사이버범죄 빈도와 정교함이 모두 증가했다고 경고합니다.


이러한 사이버범죄의 극단적 사례로 N번방 사건이 있습니다. 디지털 성범죄로,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성착취물을 찍게 협박하고 이를 유포했습니다. 범죄 대상에는 미성년자도 포함되어 있으며, 텔레그램 등 메신저라는 디지털 공간에서 이뤄졌습니다. 이 범죄는 주범들뿐만이 아니라, 단체 채팅방에 참여해 영상을 보고, 내려받고, 나아가 재유포한 수많은 가담자가 함께했습니다. 2020년 3월 경찰청 발표 기준, 전체 약 6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디지털 범죄의 특징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직접 대면하지 않아 범죄에 대한 죄책감이 낮다는 데 있습니다. 가해자는 ‘그저 봤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아이히만의 ‘그저 명령을 따랐다’와 무엇이 다를까요? 이들에게 피해자는 디지털 화면 속에만 존재했습니다. 자신은 영상 클릭만 했을 뿐입니다. 범죄 가담을 인식 못 하는 ‘사유의 불능’입니다.


스스로 사유하기를 위한 비판적 디지털 리터러시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텍스트, 사진, 영상을 마주합니다. 눈은 스마트폰을 보고 있지만, 생각은 정보를 따라가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감각이 마비된 채로 SNS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콘텐츠를 멍하니 봅니다. 인터넷에서 만나는 사람이 둔감해지고, 정보 소비가 가벼워졌습니다. 우리는 디지털의 이면을 바라볼 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힘은 ‘비판적 디지털 리터러시’에 있습니다.


교육부는 디지털 리터러시를 “디지털 시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보 이해 및 표현 능력”으로 디지털 리터러시를 정의합니다. 즉 다양한 미디어에서 정확한 정보를 찾고, 그 정보를 평가하고, 스스로 조합할 수 있는 역량입니다.


여기서 ‘디지털 리터러시’는 나아가 ‘비판적 디지털 리터러시’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기술 습득을 넘어, 비판적 평가·윤리적 행동·능동적 참여를 강조합니다. 허위 콘텐츠를 판별하는 능력, 디지털 정보의 영향력을 이해하는 역량, 책임 있는 행동을 위한 디지털 윤리 및 시민참여 의식, 그리고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해석하는 태도 등을 부각합니다.


N번방 사건은 이러한 역량들이 부재할 때 벌어지는 결과를 극명히 보여줍니다. 참여자들은 자신을 ‘단순한 관람자’로 여겼을 것입니다. 아니, 이런 생각 자체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새로운 피해를 낳게 하고, 그 범위를 넓혔습니다.


비판적 디지털 리터러시는 생각의 단절을 무너뜨립니다. 영상을 보기 전부터 불법임을 인지하게 하고, 다수가 하니까 괜찮다는 착각에 벗어나게 합니다. 범죄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비판하며, 누구의 삶에 피해를 주는지 생각할 수 있게 합니다.


N번방 사건으로 ‘보는 것도 가담’이라는 취지로 관전자 모두를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현행법상으로는 시청만으로는 처벌이 어렵습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무엇이 잘못인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디지털 공간 속 ‘악의 평범성’에 스스로 사유할 수 있는 비판적 디지털 리터러시가 중요합니다.


비판적 디지털 리터러시.png 디지털 공간 속 ‘악의 평범성’에 스스로 사유할 수 있는 비판적 디지털 리터러시가 중요하다. (이미지=챗GPT5로 생성)


디지털 시대, 비판적 디지털 리터러시로 생각하고, 질문하기


언급했듯이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은 디지털 세상에서도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조직의 명령과 시스템이 생각을 마비 시켰다면, 오늘날에는 알고리즘과 익명성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추천 영상, 익명의 다수가 참여하는 단체 채팅방, 실시간으로 재생되는 스트리밍 등은 이용자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습니다. 생각을 멈추는 순간이 반복되며, 평범한 일상에도 악이 함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디지털은 분명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도덕적 회색지대도 만들었습니다.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은 바로 사유가 부재한 이 회색지대에서 자라납니다. 이를 넘어설 힘은 비판적 디지털 리터러시에 있으며, 그 시작은 어렵지 않습니다. 일상에 무엇을 보고 있는지 한 발짝 멀어져 생각하고, 질문해보는 것입니다. 이 정보의 출처는 어디인가? 누군가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것은 아닐까? 내 행동이 또 다른 피해를 낳지는 않는가?라고 말입니다.



참고문헌

경찰청 (2023). 2023년 사이버범죄 트렌드. URL: https://www.police.go.kr


교육부 공식 블로그 (2022. 05. 19). 디지털 리터러시, 정보를 읽는 능력을 키워라. URL: https://if-blog.tistory.com/13288


연합뉴스 (2020. 3. 27). ‘n번방 관전자’ 모두 처벌 가능할까···현행법엔 곳곳 공백. URL: https://www.yna.co.kr/view/AKR20200326161000004


Arendt, H. (1963). Eichmann in Jerusalem: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Penguin. 김선욱 (역) (2006).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한길사.


Arendt, H. (2009). Responsibility and judgment. Schocken.


Ilomäki, L., Lakkala, M., Kallunki, V., Mundy, D., Romero, M., Romeu, T., & Gouseti, A. (2023). Critical digital literacies at school level: A systematic review. Review of Education, 11(3), e3425.

SBS NEWS (2020. 03. 24). 경찰, 영상 소지·배포자 6만 명 신상 공개 검토. URL: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5714306


VUKOVIĆ, D., KERUM, F., & MILKOVIĆ, M. (2025). Critical digital literacy as a key skill in higher education: Attitudes of students and professors. Journal of systemics, cybernetics and informatics, 23(2), 48-55.


WEF (2025). Global Cybersecurity Outlook 2025. URL: https://www.weforum.org/publications/global-cybersecurity-outlook-2025


*이 글은 ‘디지털포용뉴스’에 기고한 칼럼을 수정하였습니다.

https://www.dginclusion.com/news/articleView.html?idxno=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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