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심리학을 공부했더라면

감정을 몰랐던 아이, 이해하는 엄마가 되기까지

by 심우연

어릴 적 나는 유난히 조용한 아이였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도, 크게 웃는 것도 드물었다.


몸이 약해 자주 병치레를 했고,

일찍부터 '집안일을 돕는 아이'가 되었다.


슈퍼와 도매업을 함께 하던 우리 집은 늘 바빴다.

가족이 인부를 대신했고,

밤이면 자매들과 나란히 무거운 박스를 옮겼다.


놀이터의 웃음소리보다,

창고의 박스 부딪히는 소리가 더 익숙했다.

나는 노는 아이가 아니라, 일하는 아이였다.


그래서였을까.

마음속에는 종종 이런 질문이 맴돌았다.

'나는 놀아도 되는 아이일까?'


친구들과 노는 법을 몰랐다.

어떻게 웃고, 어떻게 기대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내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내는 것이 전부였다.


중학생 무렵, 나는 조용히 다짐했다.

‘이제는 나도 친구를 만들어야겠다.’


어색하게 웃고, 도시락을 나누며

조심스럽게 대화를 시도했다.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싶었지만,

마음을 주고받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나는 사람들의 감정을 잘 읽지 못했다.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마음을 이해하지 못했고,

대화는 자주 어긋났다.


아마도 외톨이로 지낸 시간이 길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무렵, ‘심리학’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남았다.

사람의 마음이 궁금했고, 무엇보다 내 마음이 궁금했다.


왜 나는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지,

왜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늘 어색한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심리학을 배우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


하지만 그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집안 사정은 늘 빠듯했고,

엄마는 하루라도 빨리 취업하길 바라셨다.


몇 번 조심스럽게 내 생각을 말해보았지만

부모님의 뜻을 꺾을 만큼 용기 있는 아이는 아니었다.

게다가 공부를 잘하는 편도 아니었다.

그래서 더 확신을 갖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꿈을 조용히 접었다.

현실이 내민 삶을 그저 묵묵히 받아들였다.




"엄마는 공감 능력이 아예 없어."


딸의 말은, 날카롭게 마음을 찔렀다.

나는 묵묵히 책임을 다했고,

딸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늘 생존에만 몰두했다.

먹고사는 일이 전쟁 같았고,

감정보다 중요한 건 버티는 일이었다.


그 속에서 마음을 돌볼 여유는 없었다.


그런데 딸은 말했다.

자신이 얼마나 외로웠는지,

그리고 내가 자신을 얼마나 몰랐는지를.


이해하려 애썼지만, 솔직히 혼란스러웠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걸까, 나는 사랑하지 않았던 걸까?'


그 말은,

내가 애써 외면해온 감정의 사각지대를 정통으로 찔렀다.

나조차 들여다보지 않았던 마음과 처음 마주했다.


사실 나는 그동안

내 마음을 곱씹고, 지켜보고, 해석하며 살아왔다.


왜 내가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

어디서부터 이런 불안이 시작됐는지를

혼자서 오래도록 되묻곤 했다.


어쩌면 나는 감정을 느끼는 대신,

감정을 분석하고 해석하려는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덕분에 버틸 수 있었고,

그 경험이 지금 글을 쓰는 힘이 되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머리의 일이었다.

머리로는 오래 곱씹었지만,

가슴으로는 충분히 느끼지 못한 채 지나왔다.


딸의 말은 그 모든 방식을 단번에 무너뜨렸다.


그 순간, 나는 머리로가 아니라 가슴으로 울컥했고,

내 안에 쌓아뒀던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졌다.


그제야 처음으로,

내 감정을 '그대로 느끼는 일'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결국 오래전 가슴에 남아 있던 단어,

심리학으로 되돌아갔다.


그 관심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게 아니었다.

사람이 왜 그런 말을 하고,

나는 왜 그런 마음이 드는지를

늘 궁금해했던, 나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감정을 읽지 못해 후회할 때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 심리학을 공부했더라면 어땠을까’


그 꿈은 결국,

사랑하는 딸들 덕분에 다시 피어났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시 문을 두드렸다.

가족 상담을 배우는 대학 과정에 지원했다.


지원서를 쓰는 손끝이 떨렸지만,

이번엔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아이들이 있었기에

나는 쓰러지지 않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이들이 분명 희생되었다.


그 희생 위에 내가 버텨온 세월이 쌓였다는 사실이

내게 가장 큰 미안함으로 남았다.


그래서 이번 선택은 단순히 공부가 아니다.

이제는 그 얽히고설킨 마음의 실타래를 풀어내고 싶다.


나를 먼저 이해하고,

가족의 상처를 감싸 안으며,

언젠가는 누군가의 마음에도

따뜻한 등불 하나 켜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늦은 나이에 꺼내든 꿈이지만, 나는 믿는다.

지금 이 순간이 나의 진정한 시작이라는 것을.


이번에는 분석이나 해석이 아닌,

감정을 그대로 껴안고 이해해보려 한다.


머리로 해석하는 이해가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나누는 이해다.


상처는 지나간 일이지만,

이해는 앞으로의 일이다.


나는 이제,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하는 길 위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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