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초안 : 엄마를 원망하지 않지만, 지워지지 않는 감정이 있다
딸과의 갈등은 내 감정을 거슬러, 어린 시절의 나에게로 데려갔다.
그 감정은 단지 지금의 것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차곡차곡 쌓여 있던 감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을 더듬던 어느 날,
나는 뜻밖에도 엄마에 대한 낯선 감정과 마주했다.
줄곧 엄마를 이해한다고 믿었고, 실제로도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기억 속 깊이 들어갈수록,
내 안의 감정은 그렇게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어릴 적 나는, 엄마의 손이 오래 머물지 못한 아이였다.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젖을 물리는 것도 꺼려졌다는
엄마의 말은, 지금도 마음 한켠을 찌른다.
엄마는 담담히 말했다.
"네가 딸이라서... 젖을 물리는 것도 싫었어."
그 말은 오래된 죄책감처럼 흘러나왔고,
나는 그 무심함 속에서 오히려 더 깊은 상처를 마주했다.
또 한 번은,
밭일을 마치고 돌아온 엄마는
오물투성이 속에서 손가락만 깨끗한 채 잠든 나를 보고
그제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깨달았다.
내가 세상에서 처음으로 배운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공포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늘 감정을 눌러가며 살았다.
가족 안에서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었고,
그냥 ‘나’라는 이유만으로 사랑받을 수 있다는 감각은
어릴 적부터 내게 낯선 것이었다.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어떻게 나 같은 애를 좋아하지? 혹시 바보 아냐?’
그런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돌이켜보면,
그 마음은 ‘사랑받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오래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장면도 있다.
누군가에겐 불편할 수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내게는 아주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내가 어떤 감정을 왜곡된 방식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를 처음 깨달은 순간이기 때문이다.
한 장면이 자꾸만 떠오른다.
처음엔 지워버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꺼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장면을 조심스럽게 꺼내려한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동생과 산에 갔다가 낯선 남자를 만났다.
그는 동생을 멀찍이 떼어놓고, 나만 데리고 숲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떨결에 따라가며,
그게 마치 ‘특별한 대접’이라 착각했다.
그 상황이 잘못됐다는 걸 몰랐다.
다행히 동생이 끼어들었고, 덕분에 더 큰일로 번지지는 않았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것이 성추행 시도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왜 그 상황을 ‘관심’처럼 느꼈는지를 천천히 이해하게 되었다.
사랑이 익숙한 아이와 사랑이 낯선 아이는,
같은 상황에서도 전혀 다르게 느낀다.
나는 그 차이를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엄마는 내게 죄책감을 품고 있었다.
나는 그 마음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도 알고 있었다.
엄마 역시 위로받지 못한 채,
자신의 삶을 감당하느라 나를 충분히 돌볼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엄마는 신도 아니다. 엄마를 탓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마음이 괜찮아지는 건 아니었다.
예전처럼 쉽게 움츠러들진 않지만,
감정이 크게 요동칠 때면
마음 한쪽에서 여전히 ‘거리를 두고 싶은 충동’이 올라온다.
지금 나는,
내 감정을 조금 더 알아차릴 수 있고
나를 숨기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하지만 아주 오래전,
감정을 말하지 못하고 기대는 법조차 몰랐던 시간은
아직도 내 안에 고요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이혼의 과정을 겪으면서,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던 엄마는
한참이 지나서야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가 말을 너무 잘 들어서,
너한테만 일을 많이 시켰던 것 같아.
그래서 네가 이렇게 된 건 아닐까 싶어... 미안하다.”
그 말은 어린 시절의 나를 단숨에 꿰뚫었다.
참는 아이, 말없이 도와주는 아이.
나는 그 역할 속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모습으로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이제야 조금씩 알게 된다.
그 방식이, 나를 얼마나 외롭게 만들었는지.
나는 엄마를 원망하지 않는다.
엄마도 고단한 삶을 감당하느라 애썼다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이해는 그 시절의 외로움을 지워주지 않는다.
내가 느꼈던 그 허전함은 지금도 내 안에 조용히 살아 있다.
이 마음은, 이해만으로는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슬프고, 억울하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마음 깊은 곳에서 불쑥 떠오를 때면,
그냥 지나쳤던 장면들이 떠오른다.
“그건 아무 일도 아니야”라고 넘겼지만,
그 순간들에도 마음은 조용히 울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이제는 그 감정을 붙잡지도, 외면하지도 않기로 했다.
한때는 꺼낼 수도 없었던 마음이지만,
언젠가는 이 감정이 내 삶을 설명해 주는 문장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는 이제,
그 감정을 조용히 흘려보내기로 했다.
그래서 지금,
나는 이 글을 쓴다.
이 글은 엄마를 탓하는 글이 아니다.
나를 회복하기 위한, 나에게 보내는 글이다.
내가 어떤 시간을 살아왔는지
그 진실을 정직하게 바라봄으로써,
지금의 나를 지키고 싶어서.
어린 나는,
엄마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조용히,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이제는 그 아이에게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 말해주고 싶다.
“넌 잘 살아남았어. 그리고 이젠, 살아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