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첫 번째로 쓴 <고졸 직장인의 마음으로 익힌 글>에서 모든 이야기가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첫 번째 글은 챕터 1이 되었고, 두 번째 글은 챕터 2라는 부제목을 달고 태어났다. 고작 1년 조금 넘게 일하고도 할 이야기가 무척 많거나, 반대로 전혀 없어서이다. 글을 조리 있게 잘 쓰는 편이 아니다 보니 걱정은 되지만 어차피 내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쓰는 푸념이자 기록이자 속앓이하는 시간이니, 글의 농도나 형태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겠다.
고졸과 대졸의 차이에 관한 생각이나 고졸 직장인으로서의 현실 정도는 저번 글에서 얼추 털어놓았다고 생각한다. 괜히 더 생각을 긁었다간 되려 진심 아닌 이상한 표현만 수두룩 쏟아질 것 같아 말을 아낀다. 재산, 명예, 권력, 사회적 지위 등에서 성공했다 자부하고 존경받는 이들도 막상 보고 있으면 그다지 부럽지는 않다. 어차피 나는 저 사람들처럼 될 수 없으니까. 나는 나 자신의 생과 사를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으므로. 풍족하고 유려한 삶은 아니지만 하루하루를 무사히 버티며 잘 살고 있다. 힘들고 힘겹지만 나름대로. 그럭저럭. 그만으로도 좋다. 자기 연민에서 비롯된 자기 합리화 또는 세뇌라 해도 딱히 반박할 말은 없다.
특성화 고등학교 졸업하고 일찍 취업한 장점은 많지 않다. 가장 큰 장점은 돈을 빨리 모을 수 있다는 것이지만, 그마저도 일찍 취업했다는 전제 하에 존재한다. 사실 최종 학력이 따라 월급 인상이나 진급에 영향을 미치는 직장은 무척 많다. 당장 내가 다니는 회사도 그런 편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직장인이라는 이름을 남들보다 몇 년 일찍 빨리 단다고 돈을 많이 벌고 많이 모을 수 있을까? 애초에 남들보다 돈을 이른 시기에 버는 게, 많이 모아두는 게 뭐 그리 중요할까? 당장 또래 친구들과 달리 돈 벌며 사는 나조차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자그마치 이천만 원의 자본이 사라지고 천만 원에 다다르는 대출금이 생기고 말았는데. 지출 많은 가정에서 태어나 자식으로 살아가는 건 당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억울함이다. 탓할 사람이 없는 분통이야말로 가장 폐쇄된 감정이다. 다만 이런 이야기는 지금 내가 하고픈 이야기와는 거리가 먼 넋두리이니 얼른 지우도록 하자.
사회는 참 고달프다. 직장이라는 이름을 가진 세상은 언제나 지나치게 뜨겁거나 따갑거나 아주 차가워서 한여름에도 냉기가 돈다. 사는 게 힘들어도 아프면 안 된다는 게 나의 조그마한 신념인데, 요즘에는 사는 것이 아주 조금 아플락 말락 하다. 그것도 고작 직장 때문에. 그건 부모 잘못 만나 인생 망쳤다는 어느 집 자식처럼 억울해서 참을 수 없는 일인데, 나의 하루 중 절반 이상이 직장에서 직장인으로 머무르는 시간이라 도저히 부정이 불가능하다. 그저 열심히 잘 돌아가야 하는 톱니바퀴로 존재하는 공간에서 받는 스트레스와 통증 때문에 삶 전체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건 받아들이지 못할 일이다.
그렇기에 지금 말하는 고졸 직장인의 외로움과 고충은, 솔직히 사회성 없는 성정으로 태어나 단체주의에 얽매인 조직에서 생활하는 어떤 사람의 괴로운 불평불만이다. 다만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어린 직장인이 날것 그대로 보고 느낀 현실이라고 바라본다면,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며 새로운 사회 모습을 구축하는 게 좋을지 윤곽이 그려질지도 모른다. 우리는 계속 변해야 한다. 더 좋게, 더 자유롭게, 더 행복하게. 나 같은 사람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직장인이 사무실 냄새만 맡아도 속이 거북해지는 일은 결코 대물림되어서는 안될 테니까.
쓰네요. 생각보다 너무 써요.
정규직, 비정규직, 계약직, 인턴, 아르바이트 등등. 직장생활을 조금이라도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나를 지켜주는 최소한의 울타리―학교나 가정 등―에서 벗어나 발 담근 세상은 너무나도 쓰다. 좀처럼 단맛이 없다. 학교에서는 수업을 듣다가 피곤하면 선생님 몰래 쪽잠을 자거나 쉬는 시간이면 친구들과 모여서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거나 혼자 조용히 책을 읽으며 들큼한 숨을 느끼곤 했었다. 얽매이는 게 없었다. 일정 시간 수업만 들으면 그걸로 나의 역할은 끝이었으니까.
당연히 직장은 그런 게 없다. 특히 바쁘게 돌아가는 각진 사무실이라면 더욱 그렇다. 잡담도 딴짓도 불가능하다. 업무 빽빽하지 않고 분위기 느슨한 직장이거나 연차가 많이 쌓였다면 가능하겠지만, 일단 365일 계절 불문하고 업무가 많으며 분위기도 제법 팽팽한 법인 사무실에 입사한 햇병아리에게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무엇보다 '귀찮은 일은 막내가 해야지!'라는 확고한 방침은 정말 막내인 나로서 당최 수긍하기가 어렵다. 특히 이런 방침은 5월 28일에 썼던 <'젊은 꼰대'의 무서움을 아는가?>에서 말한 것처럼, 나의 부모님 뻘 정도 되는 상사분들이 아니라 바로 내 위에 있는 직속 팀 선임들이 아주 강력하게 잡고 있는 것이다. 대표님 이사님 부장님보다 무서운 존재가 바로 선배님이다. 나와 나이 차이 얼마 나지 않는 직원들이 가장 무섭다.
물론 어떤 조직이든 어느 정도의 규율과 서열은 필요하므로 엄격하게 균형 잡힌 분위기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하나?' 싶은 일은 머리로 이해할 수 있어도 마음이 거부한다. 일도 못하고 사회생활도 못하는 사람이 된 건 확실히 회사가 처음이다. 학교에서는 머리 좋고 성실하고 착한 학생이었던―다만 나도 왜 내가 이런 호평만 들었던 건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내가 직장 생활하면서 답답하고 멍청하다는 말만 들으니, 면역 없던 마음이 너덜너덜해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아르바이트 경험조차 없는 고등학생에 불과했기에 유독 이런 생활에 적응하는 게 힘들었다. 지금도 처음보다 조금 무뎌졌을 뿐 여전히 적응되지 않았다. 조직 생활에는 결코 빠져서 안될 어울림이 있다는 것. 암암리에 떠도는 비난과 뒷공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 나와 생각이 다르고 세대가 다른 이들 사이에서 이해받지 못해도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것. 억울한 일이 발생해도 나는 어리고 연차도 적으니 당연히 침묵해야 하는 것. 물론 나 역시 지금보다 더 깊은 마음을, 단단한 정신을, 넓은 이해심을 가질 필요는 분명히 있지만.
그래. 난생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나는 한동안 아릿한 혀를 붙잡고 끙끙 앓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쓰고, 맵고, 자극적인 맛과 배려 없이 훅훅 변하는 온도에 수없이 데고 정신없이 허둥지둥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아는 건 없고 가르침 또한 사정없이 정수리로 떨어지는 곳에서 열심히 버티고 있다.
고달픈 사회성
가끔 직장에 있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이거 누구 좋으라고 하는 걸까?
가령 회식이라든지 야유회라든지. 나처럼 집을 좋아하고, 사회성 지극히 떨어지고, 모든 직원들과 하나같이 데면데면한 사람이 가장 질색하는, 직장의 필수가 된 친목 행사 말이다. 회식 당일이야 다들 술에 취해 웃고 떠들지만, 회식을 진심으로 원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힘없는 일개 직원은 거부할 힘이 없다. 직급에 '장(長)'을 달고 있으면 회식을 좋아할까 싶어도 과장님, 차장님, 심지어 부장님도 회식이 힘겹다고 말씀하시는 걸 보니 딱히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사님들과 대표님을 위해서라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정작 직원 야유회는 회사 높으신 분들을 제외하고 이루어졌으니까.
사실 이 고민은 아무 소용이 없다. 좋아하는 사람이 없더라도 좋은 척, 신나는 척, 즐거운 척―또는 그 당시에는 정말 좋고 신나고 즐겁다거나―을 하며 위 아 더 월드 외쳐야 하는 조직생활의 근본은 감히 추측하기도 어렵다. 사회생활은 다 이런 거다 말하지만 도대체 그 '사회생활'은 어디에서 어떻게 생겨난 건지. 행사 빈도가 회사 매출이나 직원들의 직무 능력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 같진 않은데, 어째서 우리는 행복한 사람보다 불행한 사람이 많은 웃음이 점철된 사회를 강요하고 있느냔 말이다. 그것도 고달픈 사회생활 속에서 밟히며 사는 불쌍한 사원까지 억지로 박아놓고 말이다. 그냥 놀고 싶으신 분들끼리 노시면 안 될까요.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지만 나는 퇴사하는 날까지도 절대 이 말을 내뱉지 못할 것이다.
사실 이건 '고졸 직장인'이 아닌 '붙임성 없는 직장인'의 고달픔이다. 사람 좋아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천성이 타고나지 않았다면, 경험을 통해 억지로 사회생활 능력을 기르거나 아예 그런 현실에 무뎌져야 하는 수밖에 없다니. 이게 얼마나 슬프고도 무책임한 말인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나는 인간이고 조직원이므로 정말 어쩔 수 없다.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나마 약간의 요령을 알았다면, 회식 자리에서는 술 못 마신다며 내빼기보다는 차라리 적당히 취하는 게 낫다는 사실이다. 이건 몇 달 전 회식에 갔을 때 알았다. 사내 볼링대회가 끝난 후 다른 직원들보다 먼저 도착한 식당에서 이사님께서 만드신 소주+맥주―기존 맥주잔의 절반 정도―를 빈속에 연달아 세 잔을 들이켰다. 그러자 갑자기 눈앞이 흐릿해지더니 정신이 어지럽고 몸이 자꾸 흔들리는 게 아닌가. 그건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느낀 취기였다. 술에 취했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를 깨달았다.
술에 취하면 확실히 기분이 좋다. 감각이 붕 뜨고 정신은 오묘한 세계에 빠져서 파도에 휩쓸리는지 바람에 날아가는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생각할 힘 자체가 사라진다. 그러면 구태여 무언가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술은 취하기 위해 마신다는 위험한 발언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회식이 끝난 후 택시를 타고 귀가하면서 혼자 레드벨벳의 <퀸덤(Queendom)>을 흥얼거렸다. 다행히 알코올 중독자는 되지 않을 것 같다. 술은 정말 맛없다. 그래서 난 술을 마음속으로 쓰레기 우린 물이라 부른다.
사회생활의 시작점에서 고단한 걸음을 옮기는 어린 직장인의 짙은 피로와 느른한 외로움을 누가 알아줄까. 나 혼자만이 감당해야 하는 생의 무게가 어느 날 퇴근길 발자국에 웅덩이지곤 한다.
멍청하고 쓸모없어도 받아들여지기를
며칠 전 직원끼리 서로 직무 능력과 직무 외 능력을 평가하는 날이 있었다. 직무 능력은 말 그대로 '이 사람이 얼마나 일을 잘하는가'이고, 직무 외 능력은 '이 사람이 회사에 얼마나 필요한 사람인가'이다. A부터 E까지 매길 수 있는 인원수가 정해져 있었다. 아마 나는 80% 이상에게 직무 능력과 직무 외 능력 모두 E(매우 노력 필요)를 받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아니면 100%려나. 그건 내가 알 수 없는 영역이니 혼자 망상회로 열심히 돌려봤자 별 소용은 없다.
고등학교 졸업 전에 아르바이트 경험 하나 없이―한 달 정도 서울에 있는 모 기업에서 현장실습생으로서 일하긴 했지만― 직장에 들어온 사람이 일을 잘하면 얼마나 잘하겠는가. 하물며 습득하는 속도도 느리고, 말을 이해하는 능력도 부족하고, 여러 번 설명해줘도 한 번에 알아듣지를 못하고, 몸도 굼뜨게 움직이고, 사회생활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멍청하고 쓸모없는 직원이 들어왔으니. 나에게 업무 가르치며 함께 일하는 상사분들이 나를 답답해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억지로 깎아내리는 게 아니다. 있지도 않은 자기 객관화 능력을 최대한 끌어올려 생각해도, 아마 내가 상사였다면 나 같은 직원을 바라볼 때 매번 못마땅한 눈길을 했으리라. 제발 오늘은 저 인간이 아무 사고도 일으키지 않고 무사히 잘 넘어가기를 마음속으로 빌면서.
회사는 싫고 친목 도모 행사는 싫고 젊은 꼰대는 무섭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그동안 셀 수도 없는 크고 작은 실수와 멍청한 불찰을 일으키면서 이따위로 할 거면 그만두라는 말을 듣기도 여러 번이다. 직장인으로서의 점수는 0에 가까울 정도로 쓸데없는 사람이지만, 그걸 감안하면 그동안 나름대로 너그럽게 잘 넘어간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갑자기 상사가 다가와서 "미안하지만 일을 너무 못해서 방해라는 불만이 많이 나오네요. 조만간 그만두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날이 아직은 도래하지 않았다는 게 다행이다.
그만큼 나는 일머리가 없다. 멍청한 직장인. 그 점에 대해서는 아무리 나라도 감싸줄 수 없다. 솔직히 수없이 질타와 꾸중을 들으면서도, 좀처럼 문제점을 고치기 위해 노력한 적은 없다. 얼떨결에 입사한 회사이기에 당연히 업무에는 흥미도 애정도 가지 않는다. 그러니 공부를 시작할 의욕조차 없었다. 이런 마음으로 어떻게 일을 잘할 수가 있나. 사회생활이 힘든 건 누구나 마찬가지다. 일을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조직원으로서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마음가짐은 있다. 결국 나는 내가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 내가 맡은 일을 최대한 책임감 있게, 흠집과 실수를 최소한으로 줄이며 깔끔하게 일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적어도 그런 노력 정도는 해야 나중에 회사에서 잘리든 스스로 그만두든,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는 않을 것 같다.
멍청하고 쓸모없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소속은 필요하다. 가야 할 곳과 일정한 수입이 있어야 살 수 있다. 내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불안은 아직 나에게 이르다. 아마 지긋지긋한 소속감에 진절머리가 날 즈음, 발목에 오랫동안 걸려 있던 줄을 풀고 비로소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나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았다는 자유로움을 가을바람처럼 만끽하고 있으리라.
그래도 어쨌든 살아야 하니까
고졸 직장인은 종종 상상한다.
대학교에 갔다면 어땠을까? 어떤 학문을 전공으로 삼았을까. 어떤 옷을 입고 대학교 문턱을 넘을까. 대학교에서도 친구를 사귀었을까? 만약 친구가 생겼다면 어떤 친구일까? 나의 친구들처럼 쌓이는 과제 때문에 주말에도 밤새고, 불친절한 교수 때문에 열불이 끓고, 협조라곤 일절 하지 않는 팀원들 때문에 속앓이 할까? 방학에는 무엇을 할까? 다음 학년이 되면 어떤 공부를 할지 고민하고 있을까? 훗날 대학교까지 졸업하면 어떤 직장에 갈지, 무슨 직업을 가질지 생각할까? 물음표 붙인 문장은 끝없이 이어진다. 아직 나는 경험하지 못한, 성인으로서 맞이하는 유일한 학생의 길이라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길인가. 내 삶은 나만이 그려가는 아주 거대한 지도인데, 고등학교 졸업하고 내내 직장에 시달리는 삭막한 사회인이 되니 구속 없던 창의성이 색깔을 잃어가는 기분이다. 세속적인 굴레와 견고한 틀에 함부로 발을 들였다가 내가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걱정이다. 현실을 너무 일찍 직시하는 건 별로 지 건강하지 못하다. 아는 게 힘일 때가 있다면 모르는 게 약인 순간 또한 존재하리라.
나는 언제나 세상의 모든 직장인에게, 특히 가장 구슬프고 불안한 막내 사원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같은 상황에 놓여 비슷한 감정을 안고 사는 이들을 보면 자꾸 동질감이 드는 탓이다. 정작 그들은 나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나 또한 그들의 인생을 전혀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살아야 하니까. 마음에서 타는 불을 안고 달리는 길을 찾을 때까지 방황하는 건 인간으로 태어난 슬픈 책임감이다.
직장인이 아닌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사회인이 아닌 그저 한 사람으로서 존재하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 글과 음악을 사랑하고, 책과 영화와 친해지고 싶고, 그림과 하늘과 땅과 지평선을 동경하고, 생각과 마음을 바라보고 싶은 그런 사람인가. 사람은 아주 간단하고 단순한데도 평생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서 나 또한 나 자신을 계속 알아가야 한다. 뭐가 됐든 난 나를 응원한다. 나의 순탄한 하루를 바라고 또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