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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로 가는 시냇물 Aug 22. 2021

모슬포항 하와이안 식당에 소환된  아이슬란드

[제주여행] 제주 모슬포항 작은 식당에 앉아

몇 달 전의 일이다. 윗집이 전면적인 인테리어 공사를 하는 바람에 나는 소음을 피해 제주도에 갔다. 대부분의 시간 작업을 하고 하루에 한 번 밖에 나갔다. 근처 카페나 농장에 가보거나, 한라산 짧은 코스 등산을 하거나, 뮤지엄에 구경을 가기도 했다. 그리고 매일 해 질 녘이 되면 바닷가에 앉아 노을 지는 걸 본다.


그날은 푸른 하늘에 구름이 어마어마한 날이었다. 이런 날은 노을도 장관이기 마련이라 들뜬 마음으로 지는 해를 따라 서쪽으로 달렸다. 그러나... 설렘이 무색하게도 구름이 해 뚜껑을 덮어버려서 노을은 시시하게 불발되었다. 두터운 구름의 작은 틈을 뚫고 나온 햇살이 마치 프로젝터처럼 구름에 작은 붉은 화살을 쏜 것이 전부였다. 구름의 완승이다.


일부러 서쪽 해안까지 해를 따라온 게 아쉬워 포구를 어슬렁댔다. 어라, 이건 무엇인가. 이 명랑한 이름의 식당은. 바에 앉아 메뉴를 살펴보니 피시 앤 칩스, 하와이 포케, 하와이안 해물찜을 판다?! 슬쩍 식당 안을 둘러보니 여긴 이태원인가, 어째 손님 대부분이 외국인이다. 피시 앤 칩스는 보통 흰살생선으로 만드는데, 방어가 제철이라 방어로도 튀긴단다. 방어 피시 앤 칩스라니. 궁금하면 먹어봐야지.



신발도 튀기면 맛있다는 말이 있다지만. 피시 앤 칩스의 본고장 영국에서 먹었던 피시 앤 칩스는 기름이 꾸덕꾸덕하고 맛이 없었다. 오죽하면 '영국의 피시 앤 칩스는 신문지 잉크 맛으로 먹는다'라고 할 정도다. 영국에서 피시 앤 칩스는 전쟁을 거치며 하층 노동계급이 먹는 테이크아웃 음식으로 자리 잡아, 예전에는 날짜 지난 신문지에 둘둘 말아 포장해주었다. 요즘엔 피시 앤 칩스를 시키면 신문지를 흉내 낸 기름종이를 깔고 음식을 담아내는 식당이 많은데, 아마도 이런 전통을 장식으로 살린 것이리라.


제주도에서 만난 피시 앤 칩스는 본고장 영국에 미안할 만큼 딱 좋게 맛있었다. 찍어먹는 소스를 제공했지만, 튀김옷이 적당히 짭조름해서 레몬만 살짝 뿌리는 게 제일 맛있었다. 방어가 기름진 고기라 맛이 좀 강해서, 역시 피시 앤 칩스는 대구가 최고인가 보다 했다. 다음번엔 제주도 흰살생선으로 먹어봐야지. 결코 마음 편하지 않은 제주도의 물가 탓에 하층 노동계급의 요리라 하기엔 너무 비싸긴 했지만, 즐비한 횟집 사이에서 회가 아닌 선택지가 있어서 난 좋았다.


굉장히 손쉬운 요리이지만 의외로 맛있는 피시 앤 칩스를 만나기 어렵다. 손쉬운 요리법에 익숙한 재료인데 왜 맛이 안 나는지 늘 궁금했는데, 그 의문은 의외의 장소에서 풀렸다. 지금껏 먹어본 피시 앤 칩스 중 제일 맛있는 건 아이슬란드에서였다.


특정 식당이 아니라 평균적으로 아이슬란드 어디서든 피시 앤 칩스는 맛있었다. 엄밀히는 생선살 튀김이라고 해야하나. 실은 튀김만이 아니고, 대구 스테이크도 상당히 맛있었다. 생선요리임에도 불구하고 (과장을 보태) 인치 스테이크처럼 살이 두껍고 단백고소하면서도 엄청 촉촉했다.



맛의 비밀은 단순했다. '최고급 재료를 산지에서 신선한 상태로 요리한다'. 불과 얼음의 나라, 활화산과 빙하로 뒤덮인 아이슬란드의 육지는 사람에겐 척박하다. 오랜 시간 아이슬랜더들은 어업을 생업으로 삼았고, 지금도 아이슬란드는 세계 최대의 고품질의 대구 산지라고 한다. 아이슬란드에서 대구는, 피시 앤 칩스의 본고장 영국과 대구 어업권을 놓고 실탄 발사를 불사하며 지켜낸 귀한 몸이시다. 인치 스테이크를 뜰 수 있을 만큼 거대하고 맛있는 갓 잡아 올린 대구로 튀겨내는 피시 앤 칩스라니. 어제 날짜의 신문지에겐 황송한 맛이다.


훌쩍 여행을 떠나기 어려운 시절. 작은 꼬투리 하나에도 추억 속으로 멀리멀리 여행을 보내준다. 오늘은 끼니때마다 피시 앤 칩스와 대구 스테이크 사이에서 갈등했던 불과 얼음의 나라, 존 스노우가 지키던 겨울이 나라, 아쿠아맨의 고향, 인터스텔라 얼음의 행성 아이슬란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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