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름 없는 풍경에 마음을 빼앗길 여유
지난가을, 비대면 세상이 곧 끝날 것 같은 설렘으로 총총대던 어느 날, 차에 노트북과 옷가지를 싣고 제주로 떠났다. 노트북과 핸드폰 데이터만 있으면 굳이 서울에서 바동거리지 않아도 되는, 물리적 부재가 용납되는 시기가 끝나기 전에 정처 없이 유람하는 일상을 실행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제주에서 한 달 반 정도를 보내고, 전국의 대부분의 산에서 단풍이 다 떨어지고야 제주에서 뭍으로 올라왔다. 완도에서 해남 순천 여수 남해로 삥 돌아 서울의 일상으로 돌아가기는 길. 마지막으로 보리암에 들렀다 가려고 구불구불한 길을 가던 중, 그림 같은 풍경이 눈에 뛰어 들어왔다.
짧게 탄식을 내뱉는 사이 백미러로 작게 사라져 가는 풍경에 초조해졌다. 보리암에 들렸다가 저녁식사 전까지 집에 도착하려면 부지런히 가야 하는데 어쩌나... 잠시 갓길에 차를 세우고 생각했다. ‘만약 시간이 부족하면 보리암을 포기할 수 있을까? 멀리 남해까지 와서 보리암을 보지 않고 이름 없는 저수지를 보겠다고 차를 돌리면 후회하지 않을까?
망설일수록 시간은 촉박해진다. 이내 차를 돌려 이름 모를 저수지로 돌아갔다. 보리암은 언제든 그곳에 있겠지만, 딱 이맘쯤 딱 이런 시간에 딱 이런 분위기의 그 저수지를 다시 만날 가능성은 없다. 그냥 지나간다면 나는 아마 내내 아쉽고 궁금할 것이다.
어렵게 작은 공간을 찾아 차를 세우고 조금 걸었다. 대단한 경승지도 아니고, 그저 농수로 사용하는 사람 없는 저수지인 덕분에 그 호젓함을 나 혼자 만끽할 수 있었다. 저수지 안에는 작업 타워인 듯한 건물이 교각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팔각정을 모티브로 한 것인 양 싶다. 나중에 보니 다른 저수지의 작업장도 이런 모양인 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데, 아마도 수자원공사의 미화 노력인 걸까? 바야흐로 이런 것조차 이쁜 시대다.
저수지 기슭에 다가가니 대나무인가 싶은 나무를 병풍처럼 두른 무덤을 발견했다. 와... 저 집안사람들은 이런 장소를 어찌 알고 묘를 썼을까. 근래 본 묘 중에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목적지를 향해 가던 길을 잠시 벗어나면 이렇게 예상하지 못한 풍경을 만난다. 이 작은 경로이탈만으로도 ‘삶을 온전히 만끽’하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인간의 궁극적인 종착점은 죽음이다. 그러니 삶은 종착점이 아닌 과정 자체일 수밖에. 쏜살같이 달려가버리지 말고, 구비구비 돌아가며 모든 순간을 음미하는 것이 오히려 효율적인 삶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