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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로 가는 시냇물 Jan 22. 2022

하얀 한라산, 검은 산신령

[제주여행] 하얀 한라산의 검은 산신령

지인이 '겨울 한라산 영실코스에 가볼까' 하니 생각났다.

등산이 질색이고, 겨울산은 오를 생각도 해본 적 없던 내가 겨울산의 아름다움에 푹 빠진 게 영실코스였다.


1시간 30분이면 올라간다는 말에 등산복을 챙겨 왔는데, 전날 눈이 펑펑 내렸다. 동행한 친구가 워낙 산을 좋아해서, 상황을 보러 매표소까지만 가보자고 간청했다. 눈 덕분에 사람은 거의 없었고, 귀가 시리게 고요하고 달콤한 공기가 좋았다. 거기서 이미 너무 좋아서 산에 오르는 수고까지 하지 않아도 될 성싶었다.


눈 위를 걷는 게 너무 번잡하고 불편해서 내키지 않았지만, 친구의 교묘한 협상에 말려서 딱 30분만 산책하다 나오기로 했다. 내심 나 역시 챙겨 온 등산복이 아깝기도 했고, 윗세오름 부근에서 필요할 수도 있다고 하여 아이젠이란 것도 사 왔던 터라 30분 정도는 우정에 투자할만했다.



잊히지 않는다.

등산로 입구를 통과해 첫 코너를 도는 순간 무성 흑백영화 속으로 발을 디딘 그 느낌. 눈이 소리를 가두어 귀가 먹먹하도록 고요한 하얀 세상에, 뽀드득 내 발자국 소리만 뭉퉁했다. 조금 오르다 보니 눈이 내리기 시작했는데, 눈이 가지에 내려앉을 땐 작게 '사각' 하는 소리가 들린다. 하얗게 정지된 세상에 유일하게 움직이는 검은 까마귀는 그날따라 울음소리도 내지 않았다. 소리 없이 하얀 세상을 날다 가지에 앉아 나를 응시하는 까마귀. 한라산의 산신령은 까마귀다.

30분 지점에서 나는 '아, 너무 아름답다. 딱 10분만 더 보고 내려가자' 했다. 이후 그 말을 홀린 듯이 10번쯤 반복했나.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윗세오름까지 다 올라와 버렸고, 오히려 내려갈 길만 남았다는 게 아쉬웠다. 그런 미련을 남기지 않으려는 산신령의 배려인가. 기상이 급속히 나빠졌다. 3~4미터 앞이 안 보이는 눈보라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이미 눈이 쌓여 평소의 길은 보이지 않기에, 윗세오름 등산로에는 군데군데 철봉을 꽂아 길표식이 되어있다. 그런데 갑자기 눈보라가 휘몰아치면서 다음 철봉이 보이지 않는다. '눈보라 속에 길을 잃으면 우리는 봄이나 되어야 발견되는 걸까?' 덜컥 두려움이 몰려들면서 아쉬움이 싹 사라졌다. 눈도 못 뜨는 칼바람과 눈보라에 싸대기를 맞다 보면, 히말라야도 아닌 1700미터에 불과한 산에서도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서 산악 재난 영화 시나리오가 쓰이고 있는 것과 달리, 까마귀 산신령이 보우하사 우리는 무사히 무성 흑백영화로 돌아왔다. 가벼운 두려움에 심장이 널뛰는 스펙터클 구간을 지나 평지로 내려오기 직전, 까마귀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다시 귀가 먹먹하도록 고요한 나무 사이를 걸어, 마치 놀이터에서 집에 가기 싫어 터덜터덜 걷는 아이를 달래듯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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