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개점 시간과 함께 대기표가 줄줄이 뽑아지고 있다. 덩달아 업무를 하는 직원들의 마음도 바빠졌다. 9시 오픈과 함께 대기 고객 많기로 유명한 지점이지만 몇 개월 근무 후에 적당히 적응하고 언제나 그렇듯 분주히 하지만 서두르지 않고 업무를 진행하고 있었다. 제 번호에 맞게 오신 고객님 업무를 처리하려던 찰나 대낮에 반주를 한잔 걸친 듯한 아저씨가 초록색 녹말 이쑤시개를 거침없이 쑤시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내 거 해줘!”
“네? 고객님 번호가 지났네요. 이 고객님은 제 번호에 맞게 오셔서요. 빨리 끝나는 직원이 바로 진행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됐다고 나 여기서 할 거라고! 어떻게 더 기다려! 빨리해! 나 지났다고!
배고파서 밥 먹고 왔다고!”
아...... 이 아저씨, 점심때 김치 두루치기를 먹고 오신 게 분명하다. 자기주장 강한 김치 냄새를 풍기고 치아 곳곳에 붙어 있는 고춧가루가 독보적인 빛깔을 뽐내고 있었다.
“잠깐 앉아 계시면 그럼 이 고객님하고 제가 도와 드릴게요.”
먼저 오신 고객님의 업무를 서둘러 처리하고 녹말 이쑤시개를 주윤발처럼 물고 계신 고객님을 앞으로 모셨다.
“이거 해줘!”
“네?”
“이거 한도 올려 달라고!”
“고객님 기업 상품에 해당해서 본점에 심사를 올려보고 업무를 진행해야 할거 같은데요.
지금 서류가 부족하셔서 서류 안내하고 진행해 드리겠습니다.”
“이거 가지고 그냥 해달라고! 은행원이라고 유세 떨어?”
세상에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합법적인 돈 장사 아니냐고 걸쭉하게 욕하셨던 고객님의 어불성설도 웃으면서 넘겼었는데 이번에는 은행원이라고 유세 떠냐는 말까지 듣고 있다. 그래도 웃어야지 그럼! 난 웃으면서 다시 설명했다. 하지만 이 아저씨 막무가내다. 서류를 내 얼굴 앞에서 부채같이 흔들며 신분증은 내 이마를 향해 던지기 일보 직전이다. 이쯤 되면 느낀다. 정상적인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황이라는 걸 말이다.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정중하게 업무를 진행하려 했지만 이미 나에게 날리는 반말 폭격은 당연지사에 ‘니가 나한테 돈 빌려주냐! 이 카드를 니가 만들었냐! 넌 뭐냐!’ 난리가 났다.
은행에서 주인공이 되는 건 순식간이다. 모든 시선이 나에게로 쏠리고 있었고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난 업무를 정상적으로 안내했으며 불친절하지도 않았고 늦게 다시 온 고객의 편의를 최대한 배려하려 노력했다. 이만하면 난 최선을 다 했다. 더 이상 앉아서 그냥 듣고 있을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오른손에 들고 있었던 볼펜을 사정없이 창구 밑으로 내 던졌다. 그리고 ‘내가 사표를 지금 날리고 말지 에라이!’라는 마음과 함께 일어섰다. 더 이상 참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시그널이다. 그래 이 두루치기 아저씨야 나 지금 일어났다. 그때 언제 나타났는지도 모르게 팀장님이 나타나서 내 손을 꽉 잡으며 나지막이 말씀하셨다.
“김대리 잠깐 들어가 있어”
“아니에요 과장님 제가 할게요.”
“괜찮아, 들어가서 좀 있다가 나와.”
슈퍼우먼보다 멋진 과장님은 사실 슈퍼우먼의 백 배쯤 눈치 빠른 사람이었다. 내 분노 게이지가 서서히 상승 중이라는 걸 단숨에 알아차리고는 내 손을 꽉 잡고는 고개를 한번 끄덕해 보이셨다. 들어가라는 거다. 때론 말보다 더 묵직한 행동이 존재한다. 그 길로 서고함으로 들어가 버린 나는 화를 가라앉히지 못해 연신 식식거리는 중이었다. 슈퍼우먼이 빌런을 처리하고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잘 참았어. 퇴근길에 김대리 좋아하는 아이스 바닐라 라테 사줄게, 너무 열받지 말고 있
어 알았지?”
“제가 사야지 왜 과장님이 사주세요.”
심각했던 상황이 한순간에 피식 웃음과 함께 마무리 됐다. 그리고 다시 자리로 가서 업무를 시작하려는데 옆에 있던 선배 언니가 작은 쪽지를 건넸다. 점잖게 생기신 한 아저씨가 급한 대로 은행 내부에 비치되어 있는 봉투에 짤막한 글귀를 남기시고 가셨다.
‘아가씨, (일단 기분이 좋았다. 아이를 낳고 복직했는데 아가씨라니 너무 멋진 고객님이시다) 내가 봤는데 슬리퍼 질질 끌고 무식하게 생긴 놈이 반말이나 찍찍하고, 그런 놈 신경 쓰지 말고 마음 너무 쓰지 말고 일해요. 속상해 말아요. 나도 서비스직에서 일하는 딸을 키우니 딸 생각이 나서, 힘내요!'
세상에 간신히 붙잡고 있었던 마음이 왈칵 무너졌다. 고장 난 수도꼭지같이 눈물이 주책맞게 줄줄 흘렀다. 이런 민원성 고객은 정말 많이 만났지만 오늘 일진이 사납군 정도로 웃어넘기곤 했는데 그날은 왜 유독 힘들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사실은 많이 지쳐 있었던 것 같다. 누구라도 건드리기만 하면 툭 터져버릴 정도로 눈물샘은 이미 포화 상태였다. 반복되는 고된 업무와 일상 어느 곳 하나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힘든 마음이었는데 이런 쪽지까지 받으니 무너지는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뭘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 거지 아이는 나를 밀어내고 직장에서도 이렇게 영혼을 갈아 먹히면서 일하고 있는데 이제 정말 한계에 다다른 거 같았다.
통장을 스쳐가던 월급날의 그 잠깐의 행복도, 일하는 엄마라는 자부심 느꼈던 날들도 이젠 너무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사실은 퇴직이라는 두 글자만 입에 올리지 않았다 뿐이지 이미 마음속에서는 정해진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던 것 같다.
상단사진 출처 : Unplash의 Eugenio Campora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