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오랜 고등학교 친구가 4명이 있다.
고등학교 1학년 같은 반이었던 이 친구들은 평생 함께 할 친구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하는 친구들이다. 가족들한테는 사랑한다고 말도 못 하고 손발이 오그라 드는데 친구들한테는 사랑한다는 말이 서슴없이 나오니 이 또한 신기한 일이다.
그중 오늘의 주인공은 SJ.
내가 살던 지역은 비평준화 지역이라서 대학입시 못지않은 경쟁으로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는 곳이었다. 물론 나는 공부를 너무너무 잘해서 이 지역에서 최고 가라는 고등학교를 갈 실력은 안 됐기에, 살짝 그 밑에 있는(전적으로 나의 의견이다.) 고등학교에 가게 되었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면서 학원도 옮기게 됐고 집 앞에서 학원 셔틀버스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날씬하고 기다란 여자 친구가 단정히 묶은 포니테일 머리를 하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같은 학원을 다니나 보군......’
그렇게 생각하고 고등학교 입학식 때 1학년 반배정을 받고 교실로 들어갔는데 같은 학원에 다니는 그 여자 아이를 만났다. 난 기억은 안 나는데 SJ가 이야기했었다.
그때 네가 나를 보고 대뜸
"나 너 알아! OO학원 다니지?"라고 말했단다.
어머나! 지금은 낯선 사람들한테 먼저 말을 걸지도 눈길을 주지도 않는 성격의 소유자가 됐는데 그때의 나는 꽤나 적극적이고 사교적이었나 보다.
그렇게 SJ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우리들 사이에는 책 몇 권을 써도 모자랄 만큼 웃음기 넘치고 즐거운 학창 시절 그리고 아픈 이야기도 있었다. 그렇게 많은 추억은 견고하게 쌓여갔고 몇 마디 나누지 않아도 서로를 잘 아는 사이가 돼버렸다. 그리고 이런 친구가 보낸 무심한 카톡 한 줄에 마음이 쿵 내려앉고 말았다.
결혼한 지 10년이 넘었다. 아이는 둘에 큰 아이는 초등학생, 둘째 아이는 어린이집을 보내고 집 청소를 하고 빨래도 돌리고 익숙한 듯 익숙해지지 않는 일상을 보냈다. 그리고 소파에 간신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톡!’
이 시간에 카톡은 분명 광고 일 거야 라는 생각으로 심드렁하게 핸드폰을 확인했다.
SJ였다. 엄연히 말하면 ‘SJ꾸’였다. 핸드폰에 저장된 이름은 ‘SJ꾸’
SJ가 전화 올 때면 아들은 항상 엄마친구들 이름뒤에는 이상한 글자가 붙어 있냐고 물어보곤 했다. 언제부터였는지 생각은 안 나지만 그냥 이름뒤에 알 수 없는 글자를 하나씩 붙여서 즐거움을 표시했다고 할까. 보기만 해도 반가워지는 이름이다.
'신아야 밥 먹었니?'
SJ의 첫 카톡은 이 ‘밥 먹었니?’로 시작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너무 일상적인 카톡이었는데 순간 왈칵 눈물이 날뻔했다. 하교를 하고 집에 온 아들에게 점심은 잘 먹었는지 물어보고, 어린이집에서 하원하고 온 딸에게는 점심을 잘 먹었는지 잘 지냈는지 어린이집 선생님께 여쭤보곤 한다.
남편이 퇴근 후 집에 오면 오늘 점심은 어떤 메뉴를 먹었는지 혹시나 저녁 메뉴와 겹치는 건 아닌지 물어본다. 친정엄마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나한테 점심을 잘 먹었는지 어떤 메뉴를 먹었는지 이렇게 무심한 듯 다정하게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다. 남편이 가끔 물어볼 때도 있다고 반론을 한다면 인정! 하고 넘어가야겠다.
사진출처 : Unsplash의 Jakub Kapusnak
왈칵 올라오는 눈물을 참으며 순간 니 카톡에 울컥했다는 답장을 보내니 나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이 친구, 이 또한 알고 있었단다. 밥 먹었냐고 물어보면서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단다.
서로에 대해서 너무 많이 알고 있다. 남편보다 형제자매보다 그리고 친정엄마 보다도 더 많이 알고 있는 사이다.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다행히도 가까운 곳에 살고 있어서 어렵지 않게 약속을 잡고 이 친구를 만날 수 있다는 건 내가 살아가는데 크나큰 안식처가 되기도 한다.
너무 힘이 든 날이면 그냥 만나서 서로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고 커피숍 창 밖으로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면서 풀멍을 하고 있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면 난 '나무로 태어날 거야!'하고 말하면 이 친구는 서슴없이 '난 돌멩이로 태어날 거야! 숨쉬기도 귀찮아!'이렇게 말한다. 나 보다 한 수 위였다. 숨 쉬는 일까지 계산하고 있었다니......
‘오늘 뭐 해? 바쁘니?’라는 연락만 해도
‘만날까?'라는 무심한 답변으로 내 마음을 읽어내기도 한다.
가끔씩 만나면 우리는 이야기한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다 접어두고 뛰어올 친구 4명은 확보하지 않았냐고 이 정도면 우리 괜찮은 인생을 살고 있다고 말이다.
밥 먹었니라는 이야기와 함께 우리는 무심한 듯 일상의 힘든 이야기를 서슴없이 꺼냈고 10여 분간의 대화로 마음을 위로받는다. 항상 해결책은 나오지 않고 답도 없는 고민들이지만 어떤 마음인지 이해하고 함께 공감한다. 비록 너와 나의 상황이 다르지만 네가 느낀 감정은 그리고 어려움은 충분히 그럴만하다고 언제나 내 편이 돼주는 친구라서 다행이다.
다행이고 다행이며 감사한 오전이었다.
다음에는 내가 먼저 한번 물어봐야겠다.
점심은 잘 먹었는지
퇴근은 잘했는지
오늘은 일하면서 어려운 일은 없었는지 말이다.
상단사진 출처 : Unsplash의 McNama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