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엄마는 하루에 세 번만 부를 수 있다.

by 신아

초등 6학년이 되는 아들은 매월 학원에서 월말평가를 본다.

선행도 나가고 있고 제 학년의 시험도 보고 복습으로 보는 시험도 있고 아무튼 뭐 이래저래

시험을 많이 보고는 있는데 문제는 이 시험의 결과와 그 결과를 확인한 후의 엄마의 마음상태다.


난 유치하고 치졸하고 비열한 엄마다.


시험을 잘 보고 오면 입 꼬리가 올라가서 감추려 해도 감추어지지 않는 미소를 머금고 있다.

혹자는 이런 나의 모습을 보고 너무 무섭다고 했다.


"너무 무서워 너무 무서워 혼자서 저렇게 웃는 게 더 무서워......"


그렇다 그 혹자는 모두가 상상할 수 있는 나의 전 남자 친구이자, 아이들의 친부이자 어머님의 아들이다.

그래도 그나마 이렇게 혼자서 주방일을 하며 빨래를 개며 피식피식 웃는 날이면 집안의 분위기가 꽃을 피운다. 과일을 달라며 조르는 아이들에게 어떤 과일이 좋겠냐며 물어보기도 하고 실수로 우유를 흘린 둘째 아이에게도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나이스하게 바닥을 닦아줄 정도의 아량이 생겨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분위기가 좋은 상황은 일 년에 정말 많으면 2~3번 정도 있는 모습이다.


대부분의 모습은 살얼음판이 따로 없다. 대부분은 시험을 못 보고 오기 때문이다.


일단 시험을 못 보고 오면 목 뒤부터 서늘한 기운의 분노와 울화가 치민다.

시험공부를 하는 과정을 보고 있기 때문에 어찌 될지 결과가 눈에 보였었다. 적당히 대충대충 어느 정도는 하고 넘겨버리는 아들의 성향을 간파하고 잔소리를 하지만 이 또한 이제는 먹히지 않는 시기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잔소리를 하면 아들입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소리는......


"아! 내가 알아서 할게!"

"이 자식아!! 네가 뭘 알아서 해!!"(라고 말하고 싶지만 꾹 참아본다.)


그리고 세상 다 산 사람 마냥 이 우주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인척 하고는 들어와서 본인의 초라한 점수를 꿍얼 꿍얼 읊기 시작한다. 참으로 매년 매월 반복되는 모습의 데자뷔 같은 일상이지만 어찌 그렇게 처음 받는 점수인 것처럼 연기를 하는지 이건 정말 연기대상이 따로 없다.


이제는 소리를 지르는 것도 화를 내는 것도 잔소리를 하는 것도 무의미 해져 가는 시기인 것을 알고 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저렇게 풀이 죽어서 의기소침하다가도 너무 금방 잊어버리고 해맑아진다는 사실이다. 좀 마음속에 응어리를 담고 절치부심, 와신상담했으면 좋겠는데 마음이 드넓은 나의 아들은 아직 그렇게 되기에는 인류애적인 이해의 폭을 닮고 있는 대인배인가 보다.


하루도 안 지난 다음날 아침에는 해맑은 얼굴로 배가 고프다며 식사 메뉴가 무엇인지 물어본다. 밥을 안 주고 싶다. 치사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화풀이 방법은 밥을 안주는 것이다.


그런데 밥은 준다.


밥을 먹어야 숙제도 하고 공부도 하고 학원도 갈 거 같기 때문에 일단 밥을 준다. 먹는 내내 한마디도 안 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다. 아이의 겨울방학이기 때문이다. 전 남자 친구는 출근하고 둘째 아이는 어린이집에 등원했으니 이 집에 우리 둘만 덩그러니 있기 때문이다.


이 비열하고 쪼잔하고 유치한 엄마의 화는 아마 1~2일 정도 지속 되다가 다시 자포자기를 했다가 또다시 불끈 주먹을 쥐며 다시 할 수 있다고 혼자서 파이팅 하는 형국이 반복될 것이다. 문제는 이 파이팅을 엄마 혼자만 한다는 사실이다. 울리지 않는 메아리라고나 할까......


화를 내는 단계를 좀 줄여보고 싶지만 아직은 쉽지 않다. 에너지가 많이 남아 있나 보다. 그래서 이렇게 열이 받을 때는 계단으로 집에 올라온다. 그리고 이불빨래를 한다. 이불을 두들겨 패면서 일종의 대리만족을 한다.

사람을 때리는 건 나쁜 행동이라고 배웠다. 맞다. 나쁜 행동이다.


희망적인 사실은 아직은 아이가 초등학생이라는 사실이고

절망적인 사실은 또 아직은 아이가 초등학생이라서 갈길이 구만리 같이 멀다는 사실이다.


화를 낼 대상이 없어서 그래도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고 있다.


다행이다. 글을 쓰면서 화를 내고 있는 나 자신이 겉으로는 멀쩡해 보일 수 있다.


다행이긴 한데 또 다행이지 않은 사실은 아직은 방학이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분노- 체념 - 인정- 재결심 단계에서 체념쯤의 단계에 와 있는 듯한다. 하루정도 더 있으면 인정과 재결심의 막바지에 다다를 것이다.


스스로를 다 독여본다.


그리고 아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방학기간에는 엄마를 하루에 세 번만 부를 수 있어 아침, 점심 그리고 저녁밥 먹을 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흰 눈, 2만 원 그리고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