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좋아한다 그리고 배우들을 좋아한다.
단순히 좋아한다는 말로 담기 힘든 동경심 같은 것들이 있다. 학창 시절 누구나 한 번씩은 열광적으로 좋아해 마지않는 배우가 누구였냐고 물어본다면 사실 딱히 생각 나는 배우가 없기는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드라마, 뮤지컬 그리고 배우들을 좋아한다.
정해진 길로 평범하게 살아온 일상에서 일탈을 꿈꿀 수 있는 일은 드라마나 영화 혹은 뮤지컬이나 콘서트를 봤었던 경험이 전부였다. 그 당시에 유명했던 배우들 보다도 의외로 주조연 급의 배우들 다시 말해, 최정상 급의 배우들 사이에서 살짝 빗겨나가 있던 배우들을 좋아했던 거 같다. 저 배우 조금 있는면 뜨겠는데 하면서 혼자 점쳐 놨었던 경우도 있었다.
귀신 같이 들어맞어서 몇 년 뒤 그야말로 A급 배우가 돼서 편당 어마어마한 개런티를 받는다는 기사를 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런 안목은 그야말로 지극히 개인적인 시선으로 점쳐지는 것으로 대중들이 보기에도 괜찮은 사람이었으니 그렇게 좋은 결과를 낳게 됐다는 뻔한 논리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원래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이 시간이 지나서 빛을 보게 됐다는 그런 말이다.
몇 년 전 '응답하라 1988'을 보는데 극 중 성동일의 첫째 딸 보라의 바람피운 남자친구로 나오는 박정민이라는 배우를 처음 알게 됐다. 세상 그렇게 별로인 배역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몇 분 나오지 않았지만 너무 별로라는 생각을 각인시켜 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그러고 나서 '동주'라는 영화가 유수한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며 박정민이라는 배우에 대한 기사를 종종 보게 되었는데 그 배우가 보라의 남자친구로 나왔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두 역할 사이의 간극이 이렇게 큰데 어느 것 하나 혼동되지 않을 정도로 연기를 잘한 거 보면 이 배우 꽤나 연기를 잘한다고 생각했다.
가족 모두가 잠든 조용한 시간에 영화를 한 두 편씩 보고는 했는데 이 배우의 영화가 내 일상에 많이 스며들어 있었다. 생각나는 영화를 나열해 보니 숫자가 적지 않았다.
'기적', '변산',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그것만이 내 세상', '시동', '밀수', '사바하', '하얼빈' 세상에나 배우 박정민이 등장하는 영화가 이렇게나 많았다니 리스트를 정리하면서 놀라게 됐다.
그런데 그 배우 박정민이 책을 썼단다. 2016년도에 출간되었던 책이었는데 그때 당시에 반응도 괜찮았고 그래서 2019년도에 개정판이 나왔다고 한다. 2016년도 당시에는 아이를 낳고 복직을 해서 워킹맘으로 생활하느라 책 한 권 읽을 시간의 여유도 없었는데 아이들도 조금씩 크니 이제는 여유롭게 책 읽을 시간이 생겨 보고 싶은 책들을 하나씩 찾아서 읽기 시작했다.
에세이 치고는 꽤나 묵직한 두께였다. 도서관에 예약해서 상호대차를 통해서 도서관에 책이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아 대여한 뒤, 아이를 학원에 보내고 설레는 마음으로 책의 첫 장을 펼쳤다.
작가 소개는 간단, 명료, 담백하다.
박정민
작가는 아니다.
글씨만 쓸 줄 아는
그저 평범한
당신의 옆집 남자.
가끔 텔레비전이나 영화에 나오기도 한다.
영화 <파수꾼> 혹은 <동주> 또는
<그것만이 내 세상> 아니면 <사바하> 등에서 볼 수 있고,
<타짜: 원 아이드 잭>에도 등장한다.
'아 이런 게 스웩인가?' 하는 생각으로 슬며시 웃으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어느 학교를 나와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으며 나는 어떤 사람이라는 설명을 구구절절하지 않는 이 무심한 듯 툭 던져 놓는 저자의 이력이 멋졌다. 내가 좋아하는 느낌적인 느낌의 '스웩'이다.
학창 시절의 모습부터 20대의 방황했던 시기 그리고 30대가 돼서도 아직도 철들고 있지 않음을 너무 가감 없이 그려내서 더 호감이 됐다. 학창 시절의 풋풋하거나 혹은 지질했던 기억에 대해서도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솔직하게 이야기를 털어냈고 20대의 정착하지 못했던 청춘의 삶에 대해서도 때로는 아프게 그리고 덤덤하게 그려냈다.
학창 시절, 배우의 삶, 친구들 그리고 가족들의 이야기까지 굳이 어렵거나 화려한 문체로 쓰인 글이 아니라서 읽는 내내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정말로 우리 옆집에 사는, 추운 겨울 아침에 담배를 피우려고 슬리퍼를 질질 끌고 가는, 몇 년은 입어서 물이 허옇게 날른 트레이닝 복을 입고 머리에는 까치집을 지은채 나가는 청년의 모습이 연상됐다.
그리고 상상해 봤다.
정말로 배우 박정민이 옆집에 산다면......
어린이 집에 둘째 아이를 등원시키고 오면서 같은층을 누르고 어색함을 깨고자 내가 먼저 물을 것이다.
"요새 글 쓰거나 영화 찍는 일은 잘 돼 가세요?"
"뭐 그냥 그래요......"(역시 예상했던 답변일 것이다.)
엘리베이터에 내려서 서로의 집으로 갈라져서 들어가며 또 한 번 말할 것이다.
"네 들어가세요. 팬입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이럴 거 같은 생각에 갑자기 혼자서 웃음이 터졌다. 저 배우가 우리 옆집에 산다고 해도 아침에 만나서 영혼 없이 인사를 나누는 옆집 아줌마에 불과할텐데 그래도 이 상상을 하는 몇 분 간이라도 난 즐거웠다. 참 의미 없는 상상이었다.
꽃미남에 엄청나게 몸짱인 배우도 아닌데 이상하게 신경 쓰이고 자꾸만 생각나는 것이 치명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에서 어떤 역할을 하든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게 이 박정민이라는 배우의 장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해 본다. 짧은 상상으로 슬며시 웃음이 났고 책을 읽는 동안 나 혼자만이 느끼는 내적 친밀감에 즐거웠던 시간이었다.
꼭 한번 읽어 보시기를 권한다.
20대 30대의 젊은이들은 방황하는 청춘이 나만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할 것이다. 나와 같이 40대에 육아를 하는 엄마들에게는 우리와는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옆집 청년 같은 배우의 날것의 생각을 알게 돼서 환기되는 기분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박정민의 학창시절 부모님과의 대화 내용을 보면서도 위안이 되는 부분이 많이 있었다. 이렇게 대단해 보이는 배우도 집에서는 그냥 철부지 아들이었구나 라는 생각에 말이다.
한 가지 덧붙여 보자면 이 배우가 '이영지의 레인보우'에 출연해서 불렀던 '지금껏 그랬듯 앞으로도 계속', '고민중독'이 두 가지 영상을 꼭 찾아보시기를 권한다.
오묘하게 매력적이다.
글을 쓰는 배우 박정민도 그리고 수줍은 듯 노래를 부르는 박정민이라는 청년도 참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