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할 일이 넘쳐나서 잠을 줄여야 할 때

1년 동안 하루에 4시간 자면 일어나는 일

by 메이

작년 이맘때쯤 휴직희망자 서류를 받는다는 메시지를 받았을 때, '저요!! 저 휴직이요!!' 라며 5분 만에 서류 제출을 마쳤던 것은 작년의 삶이 그야말로 깜깜한 밤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작년의 기억을 다시 기록하는 것은, 다시는 그런 과오를 범하지 말자는 의미에서이다.


작년 초에 EBS에서 문제집 집필 제의를 받았다. 오는 일 막지 말고 가는 일 아쉬워하지 말자 주의였기에 일단 오케이를 했다. 그것이 문제의 서막이었다. 전국 고등학생들이 보는,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만드는 문제집이다 보니 집필도 몹시 까다로웠지만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검토도 있었다. 그렇게 검토를 했는데도 최종판 이후에도 오류가 나오긴 했으니, 정말 하자면 끝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교과서를 집필한 적이 있기에 그 정도의 난이도이겠거니 했는데, 이건 수준이 달랐다. 매달 한 번 이상의 데드라인이 있고, 공동집필하시는 분들은 너무나 베테랑이라서 나는 매일 허덕거렸다. 만약 나에게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면 이야기는 좀 달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학교에서 일을 하고 마치면 치료센터에 데리고 가야 하는 둘째가 있고, 그 와중에 엄마 어디냐고 매번 찾는 초등학교 1학년의 첫째가 있었다. 첫째는 학교에서 교우 관계에 문제가 있었다. 집안일은 쌓여있고, 아이 둘은 끊임없이 엄마를 찾았다.


검토 데드라인이 다가올 때는 아이들이 있을 때도 원고를 들여다보려고 했지만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작업이었기에 쳐다보고만 있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고, 나는 그냥 아이들이 잠든 후에 작업을 하기로 깔끔하게 마음을 정리했다.

아이들은 평균 10시에 잠이 들고, 나는 아이들을 재우고 부랴부랴 일어나 모니터를 켜서 2시까지 집필작업을 하는 일상이었고, 아이들을 재우다가 나도 깜빡 졸다가 2시쯤 깨면 그때부터 쭉 아침이었다. 원래 잠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거의 매일 4시간을 잔다는 것은, 그리고 그 4시간 조차도 퀄리티 높은 수면이 아닌 상태인 것은, 정말로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나는 점점 하루가 까맣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침에 좀비처럼 일어나 어찌어찌 아이들을 입히고 먹이고 해서 기관에 보내고, 나는 매일 허둥지둥 학교로 뛰어갔다. 학교에서 미처 끝내지 못한 업무는 집에 싸 오는 일이 비일비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둘째를 치료센터에 데려다 놓고 첫째를 데리러 집에 가기도 일쑤였고, 도저히 1시간 정도 혼자 방치되는 첫째를 볼 수가 없어서 그렇게도 싫다고 하는 피아노학원에 욱여넣었다. 그리고 어떤 날엔 첫째가 피아노 학원에 혼자 가는 길에 넘어져서 얼굴을 정말 갈았다. 둘째가 언어 치료실에 있는 동안 나는 혼비백산하여 첫째를 데리러 집으로 뛰어가고, 왼쪽 볼을 완전 시멘트 바닥에 갈아버린 첫째를 보고 그만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어버린 날도 있었다. 그럼에도 원고 마감일은 무색하게 다가온다. 나는 첫 집필이라 분량이 다른 집필진에 비해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거의 마지막으로 꾸역꾸역 제출을 했고, 결과물은 항상 만족스럽지 못했다.


학교는 학교대로 엉망이었다. 우리 부서 회식은 우리 남편이 일찍 오는 날로 정해지거나, 아니면 나를 빼고 회식했다. 12년 차 교사이지만 여전히 학교 행정업무는 엉망이었고, 수업은 나의 마지막 자존심이니 그것만큼은 최선을 다하고자 했지만 둘째 병원 일정이나 첫째의 일정으로 수업을 바꾸는 일이 우리 학교에서 제일 많은 사람이 되었다.


집은 또 집대로 엉망이었다. 나는 하루에 4시간 자면서 일을 했지만, 집에는 왕먼지가 굴러다녔고, 집의 물건들은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고, 그 와중에 이혼하자는 남편도 있었고, 마치 싱글맘이면서 워킹맘인 것처럼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살았다. 세상엔, 내 편이, 날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1년을 살았을 무렵, 나는 정말로 탈진해 버릴 것 같았다. 정신과를 찾았다. 의사 선생님은 당장 치료가 필요하다고 하셨다. 약을 권하셨지만 받지는 않았다. 약을 먹는다고 상황이 바뀌나요? 우리 둘째가 정상발달이 되나요? 제 원고를 누가 대신 마무리 해주나요?


그 사이에 또 합숙 출장을 1주일간 다녀왔고, 출장이 끝났던 그 주에 이사를 갔다.

그리고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집필 작업도 마침내 끝났다.

나는 믿기지가 않았다.

드디어 이 삶이 끝나는구나.

난 드디어 적어도 4시간 이상은 잘 수 있구나.


그리고 방학이 되었다.

와.

이 여유가 믿기지 않아.

내가 밥을 꼭꼭 씹어먹고, 마시고 싶을 때 커피를 마시고, 여유롭게 온라인 쇼핑을 하고,

와.

내가 이럴 수 있구나.





내가 10을 담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작년의 내 삶은 15 아니 20의 삶이었다. 나는 잠을 줄여서라도 해야 할 일은 해내고 만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지만, 그것은 싱글일 때의 삶이었고, 아이가 있을 때, 특히 느린 아이가 있을 때는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걸 인정하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왜 내게는 누구처럼 친정찬스가 없냐, 남편찬스가 없냐, 그런 것에 투정부려봤자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이것이 내 삶이다.


올해 나는 치유의 삶을 살겠다고 결심을 하고 휴직을 했지만, 둘째의 주 7회나 되는 치료일정과 문화센터 일정, 건강관리 겸 시작한 새벽 수영과 매일 요가원을 한 시간은 꼭 가는 생활은 나에게 그다지 시간적 여유를 주진 않았다. 첫째가 학교에서 12시 50분 혹은 1시 40분에 돌아오면 한 시간 함께 공부를 하고, 첫째가 학원으로 떠나면 나는 둘째를 어린이집에서 하원시켜 다시 치료실을 돌고, 뭐 그런 일상이다. 주변사람들은 어쩜 그렇게 부지런히 사냐고들 한다. 나는 적어도 마감 기한을 지켜야 할 일이 없다는 거, 그리고 내가 해내는 일들이 평가받고 있지 않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이 여유로웠다.


1년 동안 4시간 자면서 얻은 교훈은, 10을 담을 수 있는 나에게 10만 주자는 것. 그 이하를 주자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만족스러울 정도로 일을 해낼 수 있는 만큼, 딱 그만큼만 받자. 내 발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정신 건강을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내 가족을 위해서 말이다. 때론 '그건 못하겠습니다.'라고 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건 나뿐만 아니라 일을 제안한 사람을 위해서도 필요한 말이다. 나는 그런 간단한 사실을 꼭 혹독하게 겪어야만 배우나 보다. 나는 항상 겪어봐야 배우는 사람이니, 작년의 경험은, 아주 나쁜 경험은 아니었다. 호되게 고생하고 교훈도 얻고, 게다가 이력서(어디에 쓸지는 모르겠지만)에 EBS 교재 집필진이었다고 한 줄 남길 수도 있고, 덤으로 돈까지 벌지 않았던가.



수요일 연재
이전 03화이혼하자는 얘기를 듣고 출근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