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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 Sep 16. 2022

더 좋은 사람이 되기로 했다.

내 남편에게

남편은 항상 내 기대 이하였다.

남편은 항상 그랬다.


내가 화를 내면 더 크게 화를 냈다.

내가 힘들다고 하면 자기도 힘들다고 했다. (때로는 생색내지 말라고도 했다.)

내가 아프다고 하면 자기도 아프다고 했다.

내가 우울증에 걸릴 것 같다고 하면 정신과에 가서 약을 받아먹으라고 했다.


나는 남편에게 약간의 애정이 있었지만

남편은 나에게 그것 조차 없는 듯했다.

우리는 맞벌이에 느린 아이들을 육아하느라 힘든 서로에게 힘은 되지 못하고 독이 되어 서로를 비난했다.


나는 때로는 이혼을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들을 보며 이내 마음을 다스리고 그냥 버텨보겠다고 결심을 하기도 했다.

이혼을 선택한 여자들이 대견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그럴 용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처음부터 그런 남자는 아니었다.

남편은 때로는 다정하기도 하고 때로는 믿음직스럽기도 했다.

오늘 퇴근길에 우연히 들은 유튜브 강의에서,

이 문제가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부가 함께 지낸 시간이 길수록 더 사이가 좋아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큰 위로가 되었다)

남편들은 점점 말을 안 하기 시작하고

사랑이란 것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자신만의 동굴로 들어간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만의 동굴로 들어간 남편에게 아내는, 꼬챙이를 들고 동굴을 쑤시며 나와서 얘기 좀 하자고 한다고 했다.

그럴수록 남편은 더 동굴 깊이 들어가고, 아내는 더 긴 꼬챙이를 준비해서 동굴을 쑤신다고 한다.

그러면 남편은 동굴 저 끝까지 들어가서 아예 나오지 않는다고.

우리 부부 얘기였다.


극히 드문 사이좋은 부부의 비결은

말을 예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굉장히 뜨끔했다.

나는 항상 남편에게 화가 나있었고

남편이 준비해온 작은 선물에도 기뻐할 줄 몰랐고

남편이 해준 작은 호의에도 고마워하지 않았다.

나와 비슷하게 성취지향적인 성격의 남편이 회사에서 자신이 이룬 성과에 대해서 얘기할 때도 콧방귀를 뀌었고

되려 그렇게 오랫동안 일하고 그 정도도 못 이루면 그게 될 일이냐고,

나도 그렇게 회사에 오래 있으면 뭐든지 해내겠다고 쏘아붙이기도 했다.

남편도 나에게 형편없는 소리를 많이 해댔지만,

나도 사실은, 형편없는 아내였다.


남편에게 섭섭함이 많고 트라우마도 있지만,

그래도 한 집에 살면서 논의해야 할 일도 많고 아이들도 키워 나가야 하는데

이렇게 우울하게 살 순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남편에게 먼저 손을 뻗기로 했다.

남편이 극히 어려워하는 대화 주제 -내 감정이 이렇다 저렇다-를 얘기하지 않기로 했다.

그건 일기장에 쓰기로 하고,

남편에게는 칭찬도 해주고, 조금 배알이 꼬이지만 자주 고맙다고 얘기하기로 했다.

내 취향이 전혀 아니지만 남편이 좋아하는 액션 마약 조폭 류의 영화를 가끔 봐주기도 하고

회사일로 늦게 온다고 하면 밥 잘 챙겨 먹고 조심히 들어오라고 얘기하기로 했다.

남편이 무슨 얘기를 꺼내면 귀 기울여 듣고 적절한 긍정적인 반응을 해주기로 했다.

일단 이 모든 것은 나를 위해서이다.

내게서 먼저 변화가 일지 않고 남편이 변하기를 바란다면

이번 생은 철저히 망한 삶이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도 마음에 들지 않는 동료 교사에게 싫은 소리 한번 못하고 “허허허 그 일은 제가 할게요”라고 호의를 베푸는 주제에

남편에게 못할 것도 없지.

이것도 사회생활이다.

이것도 내 생존 전략이다.

그렇게 애써서 남편이 변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아이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니 아쉬울 것도 없다.


그러다가 또 며칠 후에 폭발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때는 또다시 이 글을 열어보자.

내가 어떤 마음으로 변화를 시작하기로 결심했는지 다시 되새기며 마음을 잡아야지.


오늘 수리남을 3편까지 같이 본 것이 그 변화의 시작이다.

그 드라마는 전혀 내 취향이 아니었어… 하지만, 썩 나쁘지 않게 봤다. 수리남이라는 나라 구경도 실컷 했다.

그렇게 “내 취향 아니야”라고 선을 긋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지내다 보면 나는 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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