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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선희 Apr 17. 2024

삼삼한 그대들, 고맙삼.

“야!”, “너!”라고 서로를 부르는 관계가 아닌, ‘~님’하고 부르는 인간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나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지만, 글 안에 존재하고 있는 나의 진실된 모습을 보고, 심지어는 글에 적지 않았는데도 숨겨진 내 모습을 알아봐 주는 사람들이다. 그들 앞에서 나는 왜 그리도 울게 되는지, 안 울어야지, 담백하게 읽어야지 할수록, 그 말이 기폭제가 되는 건지 입술이 씰룩씰룩 거리더니 이내 짠 기운의 눈물이 흘러내린다. 왜 이렇게 질질 짜는지, 짠내가 나는지, 짜지는 건지… 이제 그만 좀 삼삼해지고 싶다.


‘삼삼하다’는 ‘음식 맛이 조금 싱거운 듯하면서 맛이 있다.’라는 뜻이다. 싱거운 듯하니, 많이 먹어도 질리지 않을 것이다. ‘3(삼)×3(삼)=9(구)’. 질리지 않으니 하루에 아홉 끼 정도는 먹을 수 있다는 뜻인가. 나름 말장난을 쳐 본다. 그런데 이 말은 인간관계에도 쓰인다. ‘삼삼하다’의 두 번째 뜻은, ‘사물이나 사람의 생김새나 됨됨이가 마음이 끌리게 그럴듯하다.’이다. ‘~님’하고 서로를 부르는 이 인간관계는 서로의 삶에 찐하게 개입하고 있진 않지만, 서로에게 마음이 끌리는 꽤 그럴듯한 관계이다.


서로에 대한 부연 설명은 글로써 전달 받게 되는데, 그러다 보니, 서로에 대해 선입견이 없다. 또 글이라는 것이 자신의 생각을 잘 정리한 것이어서, 그의 가치관을 알기에 충분하다. 글을 읽고 나서는 섣부른 조언이나 평가를 하지 않기로 약속된 모임이라서, 우리는 우선 서로에게 좋은 것을 먼저 본다. 설사 의아한 구석이 있다 하더라도 그와 나의 다른 구석임을 아주 잘 인정한다. 이러한 삼삼한 관계가 나는 참 좋다. 인’삼’, 홍’삼’ 하나씩 먹은 것처럼 기운이 솟는다.


한주에 정가운데 수요일 밤 서로의 글을 읽으며 밤을 보내는데, 이 밤에 이렇게 기운이 뻗쳐서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이 들 정도다. 그 기운을 고이고이 접어 베개 속에 넣고, 꿈에서도 그 기운 쓰지 않고, 숙면을 취한 다음, 다음 날 일어날 때 베개 속에서 그 기운을 꺼내 가방 안에 쏙 넣고서 출근하고 싶다. 눈이 나쁜 나는 육체적 피곤의 90%가 눈에서 나타나는데, 렌즈 착용할 때, 그 기운 여러 방울로 렌즈를 세척하고 싶다. 그러면 또랑또랑한 눈빛으로 그 하루를 살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어렸을 적엔 얼마나 많은 인맥을 보유하고 있는지, 그들과 얼마나 친한지가 자랑거리였다. ‘이건 너만 알고 있어’와 같이 흥미진진한 도입부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내가 뭐 되게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마음이 웅장해졌었다. 그런데 마지막은 늘 좋지 않았다. 그 특별한 이야기를 나한테만 한 것은 결코 아니었고, 그 이야기를 전한 사람 중 한 명이 나라는 이유로, 그와 관련된 소문이 돌면, 그 말을 발설한 이로 내가 지목 당하기도 했었다. 이것저것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눈다고 깊이 있는 사이는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는 말을 줄이고, 글을 늘리고 있다. 한두 마디 섣불리 입에 담을 말들을 차분히 생각하고 정리한 후, 글로 옮기고 있다. 글은 어디든 평생 남는 법이니, 내 글에 책임감을 담아 진실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글을 나누는 관계이니, 얼마나 값진 관계일까. 오늘도 만나게 될 ‘~님(모임 때 성함 넣어 읽으려고 비워 놨어요!)’들은 ‘선생님’에 가깝다. 내 글을 따라 읽어주고, ‘귀’ 기울여 주는 ‘귀인’. 서로 예의를 갖춰 대하는 조금은 삼삼한 관계, 그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끌리고 있음을 안다. 눈물을 걷어낸 삼삼한 글을 쓰고 싶지만 그것도 불가능할 거라는 것을 안다. 난 그저 충실한 독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그곳에 가져갈, 삶이 듬뿍 담긴 글을 쓸 뿐이다. 삶삶한 글을 오늘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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