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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선희 Mar 13. 2024

재겨운 건 어쩌면

‘재겹다’는 ‘매우 지겹다’라는 뜻이다. 재차 지겨움을 느끼는 상태, 곧 매우 지겨운 상황을 ‘재겹다’라고 하는 거구나 너무도 잘 알겠다. 하지만 나는 이 단어 너머에 있는 ’재미‘를 본다.


흥 많은 둘째 딸은, 길을 걷다가도 운전을 하다가도 들썩들썩 어깨춤을 추거나 박자와 상관없는 자유분방한 스텝을 밟는다. 그러면 엄마는 “아유, 지겨워”라고 말하며 깔깔 웃었다. 지겹다면서 웃는 걸 보면, 지겨운 것 안에도 재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그의 꽃은 반복과 변주에 있다고 하지 않던가. 또 재미있는 유행어도 여러 번 반복해야 웃기는 거고. 늘 반복되었던 일상 속에서 지겨움을 느꼈었는데, 이제는 그 안에 재미를 찾아 보기로 했다.


언젠가 초등학교 친구들과 글쓰기 수업을 하러 가는 길이었다. 1년 정도 진행하고 있는 수업이었는데, 벌써 지겨워졌나 왜 이렇게 기분이 축 처지는 걸까, 생각했었다. 그 수업엔 여학생만 6명 있었는데, 그 아이들은 재잘재잘 할 말이 많기도 해서, 수업 시간과 관련이 없는 자신의 경험담, 엄마 아빠 이야기, 학교 친구들 이야기까지, 몽땅 다 털어놓았다. 그러다 보면, 아이들의 목소리가 겹치기도 해서, 아주 혼란스럽다. 한번은 어떤 한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다른 아이의 이야기를 그냥 지나친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 아이는 선생님이 자신의 이야기는 들어주지 않는다며 서운해 하기도 했다. 또 한 명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모두 그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여 주면 참 좋을 텐데,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면 아이들은 쉽게 지루함을 느끼니, 이야기를 여유롭게 들어줄 수 없었다. 모두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면서도, 오늘 공부할 내용을 잘 전달하려다 보니, 90분 수업을 다 마치고 나면 힘이 쭉 빠졌었다. 그래서 지겹다고 느꼈었나 보다.


그런데! 그 안에도 재미는 있었다. 그날도 역시 늘 그렇듯, 재잘재잘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던 중, 문득 나도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졌다. “자! 근데 언제 이 글(교재) 읽기 시작할 수 있는 거야? 선생님이 엄청 준비 많이 해 왔는데, 이거 빨리 읽어 주면 안 돼?!“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억울하다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이렇게 말하면, 아이들이 서운해 할 줄 알았는데, 웬걸 깔깔깔 웃으면서 너무 웃기다고 하는 거다. 그 바람에 나도 깔깔 웃으면서 수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나는 지쳐 있었던 것 뿐이지, 아이들을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순간순간 내가 하는 일이 지겹다 느껴질 순 있어도, 내 마음 밑바탕에 깔려 있는 마음은, 아이들과 수다 떠는 것, 그리고 그렇게 수업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었다. 좋아하는 마음은 늘, 지친 마음을, 또 지겨운 마음을 이긴다고 믿는다.


루틴을 만들고, 지켜나가는 일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한 것도, 바로 재겨운 일에 재미를 찾기 위해서였다. 아침에 일어나 물 한 잔을 마시고, 괄사로 얼굴 부기를 빼 주는 것. 출근하지 않는 날에는 몇 분만이라도 바깥을 바라보면서 날씨를 가늠하는 것. 보고 또 봐도 좋은 드라마를 틀어 놓고, 실내 자전거를 타는 것. 이런 루틴 말이다. 얼마 전 글에서도 나는, 요즘 통 신나는 일이 없음을 고백했었다. 심장이 쿵쾅될 정도의 흥분은 없을지라도 잔잔한 재미가 있는 생활을 하려면, 반복되는 일상을 잘 유지할 수 있어야 함을 깨닫는다. 그리고 일상의 고마움도 잊지 않아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나의 또 다른 일터, 스튜디오에서 강의 촬영을 하는데, 첫인사를 하는 순간 목소리가 걸걸해졌다. 아 또 시작이네, 지겨워, 오늘만이라도 괜찮은 목소리로 잘 넘겼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했다. 잠시 NG를 내고, 크흐흠 아재처럼 목을 푼 다음, 다시 큐 사인에 맞춰, 목 하나도 안 아픈 사람처럼, 자본주의 목소리로 ”안녕하세요“하는데, 그런 내 모습이 너무 웃겨서 다시 또 NG가 났다. 종이가 한 번 걸리기 시작하면 계속 걸리는 복사기처럼, 한 번 목소리가 잠기기 시작하면 계속 잠겨서, 언제 아재 목소리가 나올지 모르는 상황은 참으로 지겹지만, 그래, 여기에도 재미는 있었다. 지겨운 상황에도 있는 재미, 그래서 ‘재겹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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