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제: 작심 3월 -
고유어는 우리말에 본디부터 있던 말이라, 뉘앙스만으로도 어느 정도 그 말의 뜻을 알 수 있는 경우들이 많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몇몇 경우가 있다. ‘끌끌하다’는 후자의 경우였다. ‘끌끌하다’라는 단어에서는 ‘혀를 끌끌 차다’에서와 같은 부정적인 뜻이 먼저 가늠이 되지만, 실제 뜻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끌끌하다’는 ‘마음이 맑고 바르고 깨끗하다’라는 뜻이다.
‘와, 좋은 뜻은 다 가져다가 붙여 놓았네.’
맑고 바르고 깨끗한 이에게 사람들의 마음은 자연스레 끌리기 마련이니, ‘끌끌하다’라는 말이 그래서 생겼나 보다 하고 그 뜻을 헤아려 보았다.
근데 사실, 끄는 것은, 미는 것보다는 어려운 일이어서, 다른 이들을 끌어 당길 수 있는 맑고 바르고 깨끗한 성정을 갖기란 참 쉽지 않다. 나 또한 끌끌한 사람이 되기보다 끌끌한 이에게 나를 밀어넣는 것에 더 특화된 사람이었다. 맑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 바른 마음으로 다른 이들을 배려하는 사람들, 내 것이 아닌 것에 욕심을 내지 않는 깨끗한 사람들에게 나를 밀어 두고 그들을 조금이라도 닮았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람이었다. 가까이 있으면 좀 닮겠지 하는 마음이었던 거다.
맑고 바르고 깨끗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여러 가지로 정의를 내릴 수 있겠지만, 요즘 나는 무언가를 배우는 것에 열중하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조금 더 잘하기 위해 순수한 열정을 내뿜는 사람들이 맑고 바르고 깨끗한 사람, 그러니까 끌끌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배움의 열정을 가지신 만학도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사연을 보면, 마음이 맑아짐을 느끼니 말이다.
중학생 아이들과 수업시간에 읽었던 <도산십이곡>이 떠오른다. 작품 속 화자는 옛 성현들의 가던 길, 즉 학문의 길을 따라가겠다고 다짐하면서 벼슬길과 같은 데에는 마음 두지 않겠다고 말한다. 배움이 수단이 아닌,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배움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이 진정 맑고 바르고 깨끗한 마음일 거라고 생각한다. ‘이걸 배워서 어디에 써 먹나’ 생각할 때가 많은데, 그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어디에 써 먹기 위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에 온전히 몰입하는 자세를 가져볼 것을 아이들에게도 늘 강조하고 있다.
마흔이 넘어 경주를 다시 찾았을 때, 석굴암을 보기 위해 토함산을 오르던 고등학생의 내가 떠올랐다. 이것저것 역사적인 배경을 설명해 주는 선생님의 말씀을 하나도 듣지 않고, 산을 오르는 게 귀찮게만 느껴졌었다. 계속 투덜대면서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랐었다.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때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서 이곳을 찬찬히 살펴봤더라면 훨씬 감동적인 경험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땐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신라 천년의 역사를 자세히 아는 것, 그것이 당장 내가 밥 벌어 먹고 사는 것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 순간 알기 위해 애쓰고 집중했다는 경험은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한다.
학생들은 새로운 학기를 시작하는 3월이다. 학사과정 속에서 무언가를 배우는 시기는 지났지만, 배우고 싶은 열정은 오히려 학사과정을 벗어난 지금 더 강해짐을 느낀다. 이 마음 그대로 학창시절로 돌아간다면, 전교 일등도 거뜬히 해낼 것 같지만, 지금은 아는 것을 그때는 모르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배우는 것이 행복한 거라 아무리 말해도, 지금이 제일 좋을 때라 아무리 말해도, 영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학생들을 보면, 그래, 그땐 모르는 게 맞겠지, 생각한다. 나이가 들어서 배우는 게 참 재밌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나이가 들어서도 배우는 삶을 살라는 뜻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그렇게 순수한 열정으로, 끌끌한 마음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3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