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셋째 주 토요일 혹은 일요일이 되면, 아침 일찍 일어나 대충 씻고, 집을 나선다. 가방에는 신분증, 컴퓨터용 사인펜, 연필, 검정색 볼펜, 수험표. 시험에 어떤 내용이 나오는지 알아야 강의를 할 때 ‘이거 시험에 나와요!’라고 말할 수 있으므로, 매번 가서 시험을 본다. 오랜만에 집과 가까운 동네 중학교에 들어가 고사실을 찾고 자리를 잡으면, 가방에서 필요한 것들을 책상에 올려 놓고, 미리 화장실도 다녀온다. 아침에 커피를 마시면서 온 날은 화장실을 미리 다녀오는 것이 필수코스이다. 시험은 대부분 10시 정도에 시작하는데 깐깐한 FM 시험 감독관님을 만나면, 9시 40분부터는 핸드폰을 포함한 모든 전자기기를 끄고, 보던 책도 정리해서 가방에 넣어야 한다. 수험표와 신분증 대조하는 업무를 매우 서둘러 하시는 분들이 꽤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약 20분 정도의 멍할 기회를 얻는다. 요즘은 멍할 기회가 생기면 핸드폰을 들여다 보게 되는데, 이 경우는 그 또한 하지 못하니, 정말 순수하게 멍하게 되는 시간이 마련된다. 그렇게 멍하니 있다 보면, 교실 벽에 쓰인 낙서들을 발견하는데, 그러다 보면, 이 학교의 어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지, 누가 누구와 사귀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시험을 보러 다니면서 거의 모든 학교의 벽에서 ‘집 가고 싶다’라는 낙서를 만나게 된다. ‘맞아, 집은 항상 가고 싶지, 집에 있어도 집에 가고 싶은걸, 귀엽군’ 하고 웃으며 시계를 봤는데, 아직도 15분 정도가 남아있다. 그때부턴 시험 끝나고 나가서 뭘 먹을까에서부터, 시험 끝나고 나가는 행렬이 복잡할 것을 대비하여 미리 걸어갈 루트도 생각해 둔다.
자 그래도 10분 정도가 남는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보내는 10분이다. 구경할 것도 계획할 것도 없다. 그렇게 멍하니 책상 한 귀퉁이를 바라보다 요즘 통 신나는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고 있는 일이 잘 안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안 좋은 것도 아닌데, 그냥 마음이 헛헛하고 맥이 툭 풀리는 것 같다. 내가 과연 잘 살아가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과 10년 후에 20년 후에 과연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또 멀리까지 간다.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 그 뜻을 오해하는 단어 중에 ‘멀거니’가 있다. 단어 안에 ‘멀’이라는 글자가 있다 보니, ‘멀거니’라는 단어가 ‘멀리 보는 행위’와 관련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경우들이 많은 것이다. 하지만 ‘멀거니’는 ‘정신없이 물끄러미 보고 있는 모양.’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멀거니’에는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멂’의 의미는 없다. 오히려 ‘멍하니 있는 모양’의 뜻에 가깝다. 하지만 앞서 나는 멍하니 있을 수 있는 기회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가다 아주 먼 곳까지 갔다 왔으므로, ‘멀거니’의 ‘멂’의 의미를 조금 붙여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멀거니, 멀거니….. 뭘 거니? 넌 뭘 걸었니? 살면서 인생을 걸고, 삶의 보람이나 성취감을 걸고 하는 일이 있니? 자문하게 된다. 그러고 보니 난 어떠한 일에 인생을 걸고 막 치열하게 살아본 적이 없었다. 적당한 수준에서 만족할 줄 알았고, 욕심을 냈다가도 결과적으로 잘 되지 않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생각하며 마음을 달랬었다. 욕심 내지 않다 보니, 나에게 들어온 일이라도 잘해내자는 생각으로 여기까지 온 것 같다. 그래서 내 삶은 간절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래서 이제 와 헛헛한 마음이 들었는지도. 그러다가 다시 또 멀거니, 멀거니… 뭘 또 거니! 그냥 살면 되지! 생각했다. 결과가 어찌되든, 살아가고 있는 지금이 중요하다. 10년, 20년 후 어떻게 살고 있는지가 뭐가 중요한가, 그 10년, 20년이라는 기간에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중요하지. 미래의 멋져져 있을 내 모습을 기대하면서, 간절하면 간절한 만큼 속 끓이며 살아갈 삶이 또 고통이었을 것이다. 내 헛헛함은 피자헛으로나 채우자 생각하며 더 깊이 생각하기를 멈췄다. 그래서 이 글도 여기서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