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 동안 이틀 연속 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어디도 나가지 못하고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라고 쓰고 보니, 바깥 활동을 하지 못해 몹시 아쉬운 듯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난 지금 굉장히 기분이 좋다. 비 오는 날 노동의 의무 혹은 만남의 의무로 인해 바깥에 나가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서 맘속으로 마구 소리를 지르고 있는 중이다. 난 유독 비가 오는 날 바깥 활동을 하면 몸이 아프거나 아프려고 했다. 빗속에서 걸을 때면 온몸에 힘을 주고 걸어야 하는 상황이어서 그랬을 거다. 외출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늘 다리가 저리고, 어깨가 쑤셨으니까. 양말이, 옷이, 머리가, 가방이 젖지 않았으면 해서, 몸을 움츠린 상태로, 가방을 품에 쏙 안고 물웅덩이가 없는 곳으로, 발에 힘을 주고 걸었었다. 그래서 온몸이 힘들었나 보다.
차라리 그냥 맞을걸. 온몸에 힘을 스르르 풀고 내리는 비를 그냥 맞으면 몸의 긴장이 좀 덜했을 텐데. 하나도 안 젖었다는 것을 누구에게 검사라도 받아야 하는 것처럼 왜 그렇게 보송보송한 상태를 지키려 했을까.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난 늘 어느 한 구석이 축축해졌다. 그래서 비가 추적추적 온다고 하나 보다. 비는 늘 나를 추적하고, 곧 나를 따라잡았다. 기어코 나를 축축하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비가 온전히 주인공이었던 기억은 없었다. 어떠한 기억의 한 켠에 비가 자리를 잡고 그 기억을 더 말끔히 되살려내 줄 뿐이었다. ‘언제? 기억 안 나는데…(한참 생각하다가) 아~ 그때 비 왔던 날?!’ 이렇게 비는 내 기억의 뿌연 먼지를 지워내고, 기억을 명확하고 또렷하게 살려내 주었다. 내 오랜 기억을 추적하는 순간, 추적거리는 비가 큰 도움을 준 셈이다.
수능을 100일 앞둔 시점, 백일주(?)라도 먹자며 친구들과 모였는데, 갑작스럽게 비가 내렸다. 마침 야외였고, 보이는 지붕은 하천 옆 다리 아래였고, 옆에 보이는 건 신문이었다. 신문지를 뒤집어 쓰고 저 아래까지만 달리면 되겠지 했는데, 달리다 보니 ‘저 아래’가 아니라 ‘저어어어어어어 아래’였다. 보이는 것보다 그곳은 멀리 있었던 거다. 이미 신문지는 너덜너덜해졌고, 함께 뛴 친구의 옷엔 젖은 신문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는데, 신문지를 거둬내니, 하얀 티셔츠 위에 신문 기사가 새겨져 있었다. 뭔 내용이냐 하고 내가 고개를 요리조리 돌리며 그 내용을 읽어보려 했는데, 뭐가 그렇게 웃겼는지 낄낄대느라 다 읽지 못했다. 그때 그 기사를 기억하고 있었으면, 그날을 더 확실히 기억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마저 든다.
옷에 새겨진 그 글자는 지워졌을까. 그 티셔츠는 다시 입을 수 있었을까. 지금은 소원해진 친구에게 이런 하찮은 일을 물어볼 수 없어 또 아쉽다. 글자가 지워졌든 그렇지 않든, 그 기억은 안 지워지고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아무것도 결정된 것은 없었지만 기대감만은 가득했던 고3의 그날이 추적대는 비가 아니었으면 어떤 기억 하나 추적되지 못했을 것이다.
‘비가 그치어 날이 개는 속도’를 ‘빗밑’이라고 한다. 이 말은 분명 ‘속도’를 나타내는 말인데, 이 말의 예문을 살펴보면, ‘빗밑이 가볍다’ 혹은 ‘무겁다’와 같이 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두어 낼 것이 많아서 그 짐이 무거우면 그 속도는 더딜 것이다. 그래서 빗밑은 ‘가볍다’ 혹은 ‘무겁다’로 쓸 수 있나 보다. 비와 함께 온 추억이 무거운 것이었다면 기억이 다시 사라질 때 그 속도가 몹시도 느려 마음에 께름한 잔상 같은 것을 남겼겠지만, 오늘 비와 함께 온 추억은 황당하고 가벼워서 빗밑 또한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