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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선희 May 08. 2024

비가 추적추적

연휴 동안 이틀 연속 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어디도 나가지 못하고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라고 쓰고 보니, 바깥 활동을 하지 못해 몹시 아쉬운 듯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난 지금 굉장히 기분이 좋다. 비 오는 날 노동의 의무 혹은 만남의 의무로 인해 바깥에 나가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서 맘속으로 마구 소리를 지르고 있는 중이다. 난 유독 비가 오는 날 바깥 활동을 하면 몸이 아프거나 아프려고 했다. 빗속에서 걸을 때면 온몸에 힘을 주고 걸어야 하는 상황이어서 그랬을 거다. 외출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늘 다리가 저리고, 어깨가 쑤셨으니까. 양말이, 옷이, 머리가, 가방이 젖지 않았으면 해서, 몸을 움츠린 상태로, 가방을 품에 쏙 안고 물웅덩이가 없는 곳으로, 발에 힘을 주고 걸었었다. 그래서 온몸이 힘들었나 보다.


차라리 그냥 맞을걸. 온몸에 힘을 스르르 풀고 내리는 비를 그냥 맞으면 몸의 긴장이 좀 덜했을 텐데. 하나도 안 젖었다는 것을 누구에게 검사라도 받아야 하는 것처럼 왜 그렇게 보송보송한 상태를 지키려 했을까.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난 늘 어느 한 구석이 축축해졌다. 그래서 비가 추적추적 온다고 하나 보다. 비는 늘 나를 추적하고, 곧 나를 따라잡았다. 기어코 나를 축축하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비가 온전히 주인공이었던 기억은 없었다. 어떠한 기억의 한 켠에 비가 자리를 잡고 그 기억을 더 말끔히 되살려내 줄 뿐이었다. ‘언제? 기억 안 나는데…(한참 생각하다가) 아~ 그때 비 왔던 날?!’ 이렇게 비는 내 기억의 뿌연 먼지를 지워내고, 기억을 명확하고 또렷하게 살려내 주었다. 내 오랜 기억을 추적하는 순간, 추적거리는 비가 큰 도움을 준 셈이다.


수능을 100일 앞둔 시점, 백일주(?)라도 먹자며 친구들과 모였는데, 갑작스럽게 비가 내렸다. 마침 야외였고, 보이는 지붕은 하천 옆 다리 아래였고, 옆에 보이는 건 신문이었다. 신문지를 뒤집어 쓰고 저 아래까지만 달리면 되겠지 했는데, 달리다 보니 ‘저 아래’가 아니라 ‘저어어어어어어 아래’였다. 보이는 것보다 그곳은 멀리 있었던 거다. 이미 신문지는 너덜너덜해졌고, 함께 뛴 친구의 옷엔 젖은 신문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는데, 신문지를 거둬내니, 하얀 티셔츠 위에 신문 기사가 새겨져 있었다. 뭔 내용이냐 하고 내가 고개를 요리조리 돌리며 그 내용을 읽어보려 했는데, 뭐가 그렇게 웃겼는지 낄낄대느라 다 읽지 못했다. 그때 그 기사를 기억하고 있었으면, 그날을 더 확실히 기억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마저 든다.


옷에 새겨진 그 글자는 지워졌을까. 그 티셔츠는 다시 입을 수 있었을까. 지금은 소원해진 친구에게 이런 하찮은 일을 물어볼 수 없어 또 아쉽다. 글자가 지워졌든 그렇지 않든, 그 기억은 안 지워지고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아무것도 결정된 것은 없었지만 기대감만은 가득했던 고3의 그날이 추적대는 비가 아니었으면 어떤 기억 하나 추적되지 못했을 것이다.


‘비가 그치어 날이 개는 속도’를 ‘빗밑’이라고 한다. 이 말은 분명 ‘속도’를 나타내는 말인데, 이 말의 예문을 살펴보면, ‘빗밑이 가볍다’ 혹은 ‘무겁다’와 같이 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두어 낼 것이 많아서 그 짐이 무거우면 그 속도는 더딜 것이다. 그래서 빗밑은 ‘가볍다’ 혹은 ‘무겁다’로 쓸 수 있나 보다. 비와 함께 온 추억이 무거운 것이었다면 기억이 다시 사라질 때 그 속도가 몹시도 느려 마음에 께름한 잔상 같은 것을 남겼겠지만, 오늘 비와 함께 온 추억은 황당하고 가벼워서 빗밑 또한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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