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 누우면 더욱 또랑또랑해지는 나날이 계속 되고 있다. ’무언가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지금 이렇게 지내는 게 맞는 것인가‘와 같은 고민과 불안감이 밤마다 내 눈꺼풀에 찾아오고 있는 건데, 그럴 때면, 주문을 외운다. ‘나는, 엄청 큰 사고를 치고 그 수습을 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다, 가족들과 사이 좋고, 남편이랑도 재밌게 살고 있고, 갚아야 할 큰 돈 없고…고로 난 괜찮다, 괜찮다’ 근거 없는 불안감이 드는 건, 불규칙한 프리랜서 삶속에서 일이 없는 시기를 활기차게 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쁘게 살아야 활기찬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다 하루는 그냥 언제까지 뭉그적댈 수 있을지 시험이라도 해 보자 싶어 바깥에 안 나가고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만 들여다 보았다. 그러다, 봤던 드라마 또 봤는데, 그 속에서 나처럼 똑같이 뭉그적대고 있는데 나와는 달리, 뭉그적대서 참 좋다고 말하는 남자 주인공이 보였다.
오늘 참 내가 좋아하는 소리 많이 듣네요.
… 늦잠으로 밀린 잠을 채운 토요일 늦은 아침, 세탁기를 돌리고, 다시 침대로, 한참을 뒹굴뒹굴,
누워서 책도 좀 읽고, 구름 걷힌 햇살이 얼굴에 싹 닿아서 기분이 좋아요.
그때 세탁기에서 슈베르트의 송어가 흘러나오죠. 난 그 소리가 참 좋아요.
-범수의 대사 중에서 (멜로가 체질)
이 대사를 발판 삼아, 지금의 내 생황에 한 마디, 한 문장 얹을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노란 정사각형 포스트잇에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나 하나 적었다. 할 일을 다 마치고 줄을 찍찍 그어 지워버리는 게 참 좋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말장난할 만한 단어 여러 개를 써 보았다. ‘위로해 주는 건 정말 사람을 위로 올려주는 행위일지도’ 뭐 이런 것들을 쓰고 있는데 기분이 꽤 괜찮아졌다. 뭉그적댈 때, 끄적댈 기회가 생기는 거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서 글이 안 써질 때, 무어라도 읽고, 보고 해야 하나 보다. ‘뭉그적대다’는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조금 큰 동작으로 자꾸 게으르게 행동하다’라는 뜻이다. 흔히 ‘뭉기적대다‘라고 알고 있는데, ‘뭉기적’이 아니라 ‘뭉그적’이다. 게으르게 행동하는 데에 ‘기적’을 바랄 순 없는 이유다.
뭉그적대면서 끄적대는 행동이 나와야, 글을 쓸 수 있다. 이 말은 글을 쓰고 살아가는 작가 혹은 작가 지망생에게만 해당되는 말처럼 느낄지 모르지만, 사실 모든 이들에게 ‘쓰기’는 필수라고 생각한다. 내가 누구인지, 왜 사는지,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적으면서, 끄적대면서 삶을 정리하고 성장한다. 끄적대는 가운데 새로운 생각들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조금은 게으른 상태가 ‘뭉그적’이다.
사실 생각해 보면, 나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이 딱 이랬던 것 같다. 데드라인이 정해지면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고 하루 전날까지 고민에 고민을 한다. 그날까지 머릿속에서는 몇 번이고 미션을 완료했고, 그 완료 지점까지 시뮬레이션 했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해 놓지 않은 상태였다. 내 창의력을 마지막까지 다 긁어다 쓰려고 했던 건데, 사실 게으른 사람의 변명일 뿐이리라. 그러나 결과는 꽤 괜찮았다. 시뮬레이션을 여러 번 해 본 덕분인지, 하루를 남겨 놓은 지점에서 폭발적인 집중력을 발휘하여 일을 해냈다. 어차피 최고의 경지에 오를 순 없으니, 중간 정도의 완성도를 약속한 날짜에 보여 주겠다는 일념으로 뭉그적대 왔던 것이다. 안 하지 않았다. 무언가 끄적였고, 내가 한 것에 비해 엄청나게 큰 평가가 있을 거라는 기적도 바라지 않았다. 아주 소박하게 뭉그적댈 권리를 충실히 수행했을 뿐이다.
뭉그적대니 좋았다는 글을 쓰고 있었는데, 결국은 뭉그적대면서 뭐라도 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