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더워야 맞고, 겨울은 추워야 맞다. 여름이 덥지 않고, 겨울이 춥지 않다면 그건 날씨가 이상한 거다. 지구가 아픈 거다. 그런데 가끔은 선선한 바람이 부는 여름이 반갑고, 따뜻한 햇볕이 찾아오는 겨울이 반갑다. 이열치열이라는 말처럼 뜨거울 때 더 뜨거운 것을 하는, 이른바 열정에 열정을 더 불어넣는 정서는 나와는 맞지 않는다. 그저 잔잔히 어느 정도만 따끈했으면 좋겠다.
‘푹하다’는 ‘겨울 날씨가 퍽 따뜻하다’라는 뜻이다. 푹푹 찌는 뜨거움이 아니라, 추운 겨울에 반짝 하고 나타난 따뜻한 날씨를 ‘푹하다’라고 하는 것이다. 추움을 겪어 본 상황에서 푹한 날씨는 더욱 반가웠을 테고, 그래서 푹한 날씨는 더욱 희소가치가 있다.
제주 여행을 하던 중에, 제주에서 1년 살이를 하고 있던 친구 가족을 만난 적이 있었다. 유난히 낯가림이 있던 친구의 딸은, 밥 먹고 커피를 먹는 동안에도, 나의 재롱에 반응을 보여 주지 않았다. 밥집에서 카페로 이동할 때, “이모가 옆에 앉을까?“ 했더니, ”아니, 엄마가 앉아“라고 했다. 아 쉽지 않구먼.. 서두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가 짠 하고 얼굴을 드러내며 까꿍하고, 웃긴 표정 지어주는 것으로도 마음이 열리지 않는다면, 서두르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으니, 차근차근 따땃해져야지 생각했다. 헤어질 때가 되었고, 두 손 가득 짐을 든 친구 대신 내가 아이의 손을 잠깐 잡고 주차장으로 걸어 갔다. 친구와 헤어지고 난 후 친구는 나에게 카톡을 보냈다.
“OO가 너 보고 손이 따뜻하대.”
그렇다! 나에게는 손이 따뜻하다는 무기가 있었다. 그 무기를 적극적으로 썼어야 했다. 자기소개서에 ‘손이 따뜻하다’라고 꼭 써야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인사를 건넬 때, ‘손이 따뜻한 오선희입니다’라고 해야지, 아이디며 비번까지 ‘warm hand’라고 해야지… OO의 한마디에 내 정체성까지 바뀔 것 같은, 누가 보면 오바라고 할 정도의 감격을 했다. 내 따뜻한 손을 아이가 꼭 기억해주길 바라면서, 영상통화를 할 때마다 나를 ’손 따뜻한 이모야‘라고 소개했다. 아이의 마음에 ‘푹’ 하고 안길 수 있길 바라며.
하루는 중학교 3학년 △△가 수업 시간에 내 설명을 듣더니 엄지와 중지를 여러 번 튕겼다. ‘딱’ 하고 소리를 내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되는 듯 보였다. 쓱쓱 하고 살갗이 스치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내가 설명한 부분이, 마침 △△가 몰랐던 부분이었나 보다. 그래서 놀라운 마음을 담아 ‘아하’하는 표정으로 손가락을 튕기고 싶었는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아 당황하는 게 너무 웃기고 귀여웠다. 그리고 다음 수업에서는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내는 것에 성공했는지 그렇지 않은지 물어보았다. 이 아이가 좀 더 커서, 손가락에서 소리가 나는 순간을 직접 본다면 얼마나 신기할까.
부모님들은 아이들의 삶에 열정적으로 깊이 관여하니, 매일매일이 재밌고 귀엽고 즐거울 수만은 없을 것이다. 아이들의 먼 미래까지 걱정하느라, 가끔은 손가락 튕기기 같은 작은 부분은 신경쓰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럴 때 나 같은 어른이 신경 써서 봐주면 어떨까 생각한다. 그게 내 역할이라 생각한다. 부모님들의 사랑은 뜨거운 여름 같다면, 내 사랑은 푹한 정도라고 말할 수 있다. 주변의 아이들에게 딱 이 정도로 따땃하게 남아있고 싶다. 가끔은 아무런 참견하지 않고, 고민을 들어줄 상대가 필요하지 않던가. 난 따뜻하되, 간결한 한 마디, 다른 어른들은 해 주지 않을 신박한 한 마디를 준비해서 고민을 말해 줄 아이들을 기다릴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