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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선희 Jun 12. 2024

도파니 몰아서

화장실에 들어갈 때의 필수품, 핸드폰 되시겠다. 짧은 영상 여러 개를 휙휙 넘기며 보다 보면, 어느새 시간은 30분 이상 흘러 있다. 내가 화장실에 들어온 게, 생리현상을 해결하기 위함인지, 이 영상을 보기 위함인지 헷갈린다. 한 번은 지도를 보려고 핸드폰을 들었는데, 내 손가락은 지도앱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숏츠나 릴스를 보여주는 앱으로 향했다. 핸드폰을 들면 으레 그 앱을 가장 많이 눌렀던 것을 몸이 기억하는 것이다. 그렇게 또 나는 해야 할 일은 빠르게 재깍 끝내지 못했다.


자기 전까지 핸드폰 속 영상에 빠져 사는 요즘,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재미있고 중독성 있는 매체에 빠져들면 도파민이 분비된다고 하는데, 지금 나도 그런 걸까? 새로운 것을 탐색하거나 성취하는 과정에서, '기쁨'의 감각과 감정을 지배하는 신경전달물질로서 도파민이 나오는 거지만, 현재 나는 즐겁고 재밌어서가 아니라, 그냥 습관적으로 영상을 보고 있으니, 도파민 분비는 안 되는 것 같다.


‘도파민’과 묘하게 모양이 닮아 있는 고유어가 있다. 바로 ‘도파니’인데, 이 말은 ‘이러니저러니 여러 말 할 것 없이 죄다 몰아서’라는 뜻이다. 우리가 온 신경을 죄다 짧고 자극적인 영상에 쏟고 있으니, ‘도파민’과 ‘도파니’는 모양도 닮아 있지만, 뜻도 닮아 있는 것 같다.


요즘 나는 녹음 작업을 하고 있다. 초등학교 1, 2학년 아이들이 국어 시간에 배우는 내용을 잘 설명하여 녹음하는 것인데, 소리가 울리지 않게 잘 녹음하려면 소리가 퍼지지 않는 공간, 이를 테면 옷방 같은 곳에 틀어 박혀 녹음을 진행해야 한다. 녹음 파일 하나의 시간은 1~3분 내외로 짧지만, 그 개수가 방대해서 미션을 도파니 완수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다른 소리가 들어가면 안 되니, 선풍기도 틀 수 없고, 삐그덕 거리는 의자 소리도 나지 않게 하려면 몸을 최대한 고정시킨 채 녹음 작업을 해야 한다. 컴퓨터와 마이크까지 바리바리 싸서 옷방으로 이동하고 나면, 들인 정성이 아까워 꽤 오래, 주어진 내용을 도파니 완료하고 나오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작업하다 보면, 온 얼굴이 땀 범벅이 되어 꼬질꼬질해진 상태로 방을 나오게 된다.


국어 교과다 보니, 올바른 발음으로 또박또박 막 아나운서처럼 말하고, 가끔은 이야기 속 인물의 감정을 담아 동화 구연까지 하다 보면, 작은 방 구석에서 현타도 오고, 나중에 눈이 침침해져서 너무 쉬운 단어도 막 이상하게 읽어 버리게 된다. 다 읽었는데, 마지막 줄 즈음에서 잘못 읽으면 다시 처음부터 녹음해야 해서 진심 육성으로 욕이 나온다. 선생님이 이렇게 욕을 잘하는 사람인 것을 아이들은 몰라야 하니, 다시 맘을 다잡고 녹음을 진행한다. 처음 읽은 것처럼.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집중력과 효율성이 유지되는 시간을 잘 알 것이다. 나 또한 체력과 집중력이 달려서 더 이상 일을 진행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지만, 도파니 일을 해냈을 때의 성취감을 맛보고 싶어서 무리한다. 마치 피곤함을 무릅쓰고 도파민을 품품 뿜으며 밤 늦게까지 핸드폰 속 세상에 빠져 있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렇게 일을 마무리하려고 무리한다.


“분량이 너무 많아서, 말씀해 주신 시간에 완료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시간을 조금만 더 주세요.”라고 말하면 내 능력이 거기까지라고 말하는 것 같아 용납할 수 없는 거다. 프리랜서들은 못하겠다고 하는 순간, 다음 일은 보장될 수 없으므로 늘 긴장하며 약속된 시간을 맞추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또 과로한다. 내가 이거 좀 늦게 한다고 큰일나는 것도 아닐 텐데, 일을 준 사람들도 여유를 두고 준 것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조금 더 깡을 부려보고 싶지만, 선천적 그리고 후천적으로 소심함을 탑재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게 쉽지 않다.


그러나 강의 노동자로서 나의 삶을 조금 더 길게 내다본다면,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내 효율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잘 분별하며, 모든 것을 도파니 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음악은 잘 모르지만, 피아노 건반의 ‘도’와 ‘파’는 다소 멀다. 내가 알고 있는 최선의 안정된 1도 화음, ‘도’, ‘미’, ‘솔’처럼 적당히 간격을 두고 일처리를 해 보고 싶다. 그렇게 내 삶에도 조화로운 화음을 만들어 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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