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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선희 Oct 09. 2024

오달진 상상

“안녕하세요, 작가 오달지입니다.”     


인생 처음으로 북토크를 하게 된 책은 그동안 썼던 고유어에 대한 에세이였다. 반 년 동안 열심히 만든 한국어 시험 문제집이 출판되는 시기에 맞춰 에세이도 함께 출판하게 되었다. 두 책의 절묘한 어울림이 참 맘에 들었다. 뿌듯한 마음으로 북토크를 열었다. 역시나 글감을 어떻게 모으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글감을 따로 모으는 순간은 없다고 답했다. 그저 현생을 살아가다 보면, 글감들이 어느샌가 내 옆에, 내 눈앞에 와 있노라고 답했다. 다양한 단어들을 만나는 직업이다 보니, 열심히 하루하루 살다 보니 글감들이 모이게 되었다고, 그래서 나의 직업이 참 맘에 든다고 답했다. 때론 너무나 어색해서, 외국어 같아 보이는 고유어들을 몇 개 더 소개해 드렸고, 재미있는 고유어와 그에 맞는 그림을 함께 그려 만든 키링을 선물로 나눠 드렸다. 내가 뭐라고 이 자리에 앉아 있나 생각이 들다가도, 차곡차곡 쌓아 온 내 이야기가 독자분들에게 다시 차곡차곡 전달되는 느낌이 참 흐뭇하고 좋았다.      


내 필명을 ‘오달지’로 지은 것도 흐뭇한 이 마음과 관련이 있다.  ‘오달지다’는 ‘마음에 흡족하게 흐뭇하다.’, ‘허술한 데가 없이 알차다.’라는 뜻이다. 이 말의 유의어에는 ‘오지다’가 있다. ‘오지고 지리고 렛잇고’ 할 때 그 ‘오지다’. ‘오지다’는 은어나 속어가 아닌 표준어이다. 마침 나는 ‘오씨’이고, 열심히 노력한 만큼, 그 노력이 빛을 발하게 될 때, 갖게 되는 흐뭇한 마음을 누구보다 사랑하니, 내 이름은 ‘오달지’가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중에 더 유명해지면, 누군가 날 보며, ‘오달지다’라고 외칠 것이고, 그러면 자연스레 날 보고 ‘흐뭇하다’라고 말하게 되는 셈이 되겠지.      


오늘 내 상상은 여기까지 갔다. 혼자 흐흐흐 웃으며, 상상에서 현실로 돌아왔는데, 따지고 보면 상상이 아닌, 선언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미리 선언을 해 두면, 꼭 이대로 이루고 싶어서 더욱 노력하게 된다고 하니, 이 선언은,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이루게 될 계획표가 될지도 모르겠다.      


지난주에는 내 인생에서 최초의 사건이 있었다. 국립국어원에서 주최하는 ‘전 국민 받아쓰기’ 대회에서 상을 받게 된 것이었는데, 꽃다발과 상장과 ‘버금상’이라고 적힌 판때기까지 야무지게 챙겨서 금요일 저녁 지하철을 탔다. 누군가는 ‘저런 대회가 있었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나는 부끄러운 마음 하나 없이, 그저 흐뭇하게, 오달지게, 묵묵히, 계속 기분이 좋았다. 대회를 잘 준비하고 싶어서, 일주일 전부터 책장을 뒤져, 공무원 국어 강의를 할 때 정리해 두었던 수업 자료를 찾았다. 그 자료를 한 장 한 장 넘겨 보는데, 감회가 새로웠다. 헷갈리는 맞춤법을 다 정리해 두고, 비슷한 표기인데 다른 뜻을 지닌 낱말을 정리하기 위해 표준국어대사전을 검색했던 수많은 날들이 떠올랐다. 수업 중 내가 준비하지 않은 부분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땐 ‘오달오달(오들오들)’ 떨기도 하는 날들이었지만, 결국은 그날들이 쌓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퍽 오달진 마음이 든다. 그 자료를 보지 않았다면 몇 개는 더 틀렸을 것을 생각하니, 더욱 오달지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해졌다. 이쯤 되면, 한해가 다 가고 있는 것 같아 괜히 헛헛한 마음이 들지만, 포기하지 않고, 존중하며 버틴 절반 이상의 올해가 오달져서 다행이다. 이 마음이 더욱 의미 있는 것은, 올해 초 나의 모습 때문이다. 그땐 일이 없어 불안했고, 그래서 매일 매일 종이 한 장 펼치고 이것 저것 적어 보면서 갈피를 잡으려 애쓰던 시간이 있었다. 연초부터 ‘망했네’를 연발하며 지내왔건만, 10월의 어느 날, 나는 ‘오달지네’를 외치는 순간을 맞이했다. 인생, 모른다… 지금의 발걸음은 자잘해도, 훗날 돌아보면, 작은 보폭들에 의한 진하고 두꺼운 경로가, 살아온 방향성이 내 인생에 그려져 있을지도 모른다. 앞서 상상한 많은 일들이 이루어지는 날, 성지 순례하는 마음으로 다시 이 글을 꺼내 읽고 싶다. 오달진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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