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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 Jan 06. 2024

열등생이 된 나 자신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2화

생각이 많을 때 대처하는 법, 그러니까 '나는 왜 이렇게 생각이 많지?'라며 패닉에 빠지기를 중단하고 그쯤에서 더는 생각이 커지지 않도록 마음을 가라앉히는 법은 아마 어릴 때부터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생각이 많아서 불편한 적이 많기는 했지만 그래도 '생각이 많아서 돌아버릴' 지경인 때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오만 가지 생각을 머릿속에 담고 다닌다기엔 나는 집중력이 좋은 편이었다. 독서 삼매경에 빠져 하루를 보내기도 했고 영어나 국어 같은 과목을 좋아해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서서 공부했다. 대학교에 가서도 다행히 전공 공부가 마음에 들었던 덕분에 나쁘지 않은 성과를 낼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법조인이 되겠다는 결심과, 나는 어쨌든 공부를 좋아하니 공부로 승부 보는 곳에선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자그마한 믿음으로 로스쿨에 입학했다. 사실 그때 나는 아주 커다란 착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공부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내가 잘 하는 공부 하는 걸 좋아했다. 어린 시절부터 대학생 때까지 지치지 않고 공부할 수 있었던 건 그 대상에 내가 높은 성취도를 보일 때로 한정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일찍부터 예견되어 있었다. 12살 무렵에 보았던 학습 적성 검사 결과는 말했다. "이 학생은 자신이 상위권에 드는 곳에서 좋은 성취를 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학습에 대한 의욕을 잃고 방황할 수 있습니다." 대학생 때는 운 좋게 내가 좋아하는 분야 위주로 공부할 수 있었고 덕분에 성적이 좋았다.


하지만 로스쿨에선 그렇지 않았다. 로스쿨에서 배워야 할 과목들은, 그중 일정 부분 내가 흥미를 보였을지라도, 아주 방대한 양과 복잡한 논리로 가득 차 있었다. 일말의 흥미를 가지고 전공 책 한 권을 펴들었다가도, 이 모든 것이 이렇게나 꼬여있다는 것에, 그리고 이렇게 꼬여있는 지식들을 다 암기해야 한다는 사실에 겁을 먹곤 했다. 그렇다 보니 내 공부는 도저히 진도가 나가지 않았고, 나는 내가 전혀 잘 하지 못하고 그러한 이유로 딱히 호감이 가지도 않는 학문에 피 땀 눈물을 쏟아부어야 하는 상황을 마주했다.



지금은 흑역사가 된 '뉴스데스크 게임 폭력성 실험'에서,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난폭하게 변해버린 청소년들"처럼 나는 이러한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우울하게 변했다. 게다가 마침 때는 2020년,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어디 자유롭게 외출하거나, 평소와 같은 방법으로 기분 전환이 가능하던 때도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무언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하면 상황이 바뀔 거라고 믿었다. 그러한 믿음 아래 책상 앞에 꾸준히 앉았지만 머릿속은 갖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기만 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지금 중간고사가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이정도 암기와 이해 수준으로 답안지에 뭘 쓸 수 있는가? 아니 지금 상황을 다 떠나서, 고작 이정도 지식 수준으로 재판에는 어떻게 서고 의뢰인은 어떻게 만난단 말인가?


남들은 미래를 생각하며 공부 동기 부여가 된다는데 나는 동기 부여가 되기는 커녕 미래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선배나 동기들에게 상담하면 다들 "그래도 버티면 졸업할 수 있을 거고, 그러고 나면 훨씬 더 적성에 맞는 일을 할 수 있을 거다"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사실 버티는 것 외에 딱히 할 일도 없어서 나는 그냥 무작정 버텼다. 


그러다 머릿속이 생각으로 가득 차 뻥 텨져 버린 건 어느 봄날이었다. 아마 5월이었을 것이다. 정확히 2020년 5월. 팬데믹의 한 가운데서 나는 비대면 강의를 듣고 있었다. 그 강의는 가뜩이나 교수님이 설명을 명확하지 않게 하시는 데다 진행 방식이 혼란스러워 내 머릿속의 번잡스러움이 더 가중되었다. 교재를 보아도 수업을 들어도 내가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이전까지 무엇을 배웠는지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기말고사가 2주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자 나는 너무나도 무서워졌다. 내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하나의 시뮬레이션이 돌아갔고, 과부하가 걸리기 시작했다.


지금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이해가 안 됨 -> 하지만 다른 수강생들은 다 이해하는 것 같음 -> 지금 이 과목 뿐만이 아니라 나는 모든 과목이 하나도 이해가 안 됨 -> 하지만 다른 학생들은 좋은 성취도를 보이고 있음 -> 나는 답이 없고 이 학교 최고의 열등생임 -> 그런데 앞으로 2년 넘게 더 다녀야 하고 배울 건 앞으로 지금까지 배운 것의 10배 정도 될 것임 -> 지금 배우는 것부터라도 잘 공부해야 함 -> 근데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뭘 공부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정말 어떡하란 거지


이 시뮬레이션이 100번 쯤 돌아갔을 때 나는 위험한 정신 상태에 빠졌다. 그게 내가 자살충동을 진심으로 느껴본 첫 경험이었다. 나는 갑자기 열등생이 된 나 자신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끊임없이 고민했지만 당연히 고민에는 답이 없었다. 해결 방법은 단 두 가지. 내가 우등생이 되거나, 그냥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뿐이었는데 나는 둘 중 어느 것도 선택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공부에서 좋은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건 그저 대체로 내가 운이 좋게 잘 맞는 분야에서 공부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걸 인정하는 게 너무나 어려웠다.


내가 잘 하는 것에 더는 공부가 포함되지 않는다면, 나는 그저 생각만 많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겉늙은이라는 걸까? 그렇게 생각한 끝에 나는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 없게 되었고, 한 글자의 글도 적을 수 없게 되었고, 음식을 입에 대는 것도 어려워졌다. 결국 한밤중에 숨을 쉴 수가 없어 잠에서 깨어나 응급실에 갔다.


- 3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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