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4화
'생각 버리기 연습'이라는 책이 있다. 일본의 어느 스님이 쓴 책인데 요약하자면 요즘 사람들은 잡다한 생각이 너무 많기 때문에 좀 버려야 한다는 내용이다. 당장 온갖 생각을 내다 버릴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우선 '버리는 연습'부터 시작하라는 건데, 꽤 오랜 기간 그 책이 우리 집에 있었고 나는 그 책을 열심히 읽었지만 딱히 도움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이제 와 돌아보면 생각은 버린다기 보다 참는 쪽에 가까운 것 같다. 하나의 자극이 주어지면 그에 따라 끝없는 생각이 이어지는데, 그런 상황에서 '생각아 저리 가라'하고 손을 휘젓는 건 대체로 별 효과가 없고, 그저 꾹 참아야 한다. 온갖 생각이 밀려와도 그냥 파도에 몸을 맡기는 사람처럼 가만히 있으면 생각은 분명히 다시 빠져나가 사라진다.
하지만 2년 전 한창 정신 상태가 안 좋던 나는 그런 사실을 잘 몰랐다. 그저 생각을 어떻게든 버리려 애쓰는 게 답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렇게 생각을 버리는 데 성공했다면 내가 이런 글을 쓰고 있지 않겠지.
그때 나는 우울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언가 노력을 해보려 해도 부정적인 생각이 나를 가로막았다. 예를 들어 산책도 하고 바람도 쐬며 우울함을 떨쳐 내려고 하면, 산책을 해봤자 뭐 바뀔 게 있을지 반문하게 되었고, 날씨가 더우면 더워서, 추우면 추워서 나가기가 꺼려졌다. 나갔다 오면 빨랫감이 더 생기는 것도 부담스러웠고, 혹시 로스쿨 동기와 마주치면 어쩌나 온갖 걱정이 되었다(나는 그때 학교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 걱정을 비롯한 부정적인 생각이 다 핑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그런 핑계들을 다 딛고 일어나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나는 잘 몰랐다.
사실 이런 상황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안은 '일단 하는 것'이다. 이런저런 근심 걱정을 꾹 누르고 밖에 나가는 것. 그리고 왠지 위축되고 집에 들어가고 싶을 때마다 그런 마음을 참고 한 발짝 한 발짝 옮기는 것. '착한 경찰 나쁜 경찰' 전략이 나 자신을 대할 때도 필요한 셈이다. 나 자신을 격려하고 든든하게 편이 되어주는 행동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어떤 불만을 이야기하든 그저 등을 떠밀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를 냉정하게 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2년이 지나갔다. 나는 그 2년간 완전히 고삐가 풀렸고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크게 망가졌다. 일단 학교에서 좀 벗어나고 싶어 휴학을 했는데, 최소한의 해야 하는 일조차 사라지니 그야말로 사나 마나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게다가 그 무렵 5년 가까이 연애한 애인과 헤어지면서, 내가 방 밖으로 나오고 사람답게 살도록 독려하는 사람도 없어져 버렸다. 장기연애가 허무하게 끝나면서 그 오랜 기간 동안 내가 참아왔던 문제들이나 좋지 않게 남았던 사건들도 새삼 뭍으로 올라왔다.
절제와는 아주 많이 거리를 둔 채 2년을 보냈다. 집안 곳곳에 술병이 굴러다니기 일쑤였다. 그때의 내 집안 꼴을 생각하면 현기증이 난다. 그때 나는 간 건강이고 정신 건강이고 뭐고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신경을 쓰고는 있었으나 그냥 그대로 놓아 두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살다가는 어두운 미래가 올 것임을 알았지만 그 어두운 미래가 내 것이 아닌 양 행동했다. 그러고 있으면 사는 게 내가 사는 게 아니라서 괜찮은 것 같았다.
그때 만나던 심리 상담 선생님은 내 행동을 알코올 중독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그 사실을 인정했으나 이상하게 술을 끊지 못했다.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마음가짐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 마음가짐은 스스로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알코올 중독에 대해 다룬 책을 읽다가 이런 부분을 본 적이 있다. 대부분의 정신병은 환자에게 병식(자신에게 병이 있다는 인식)이 있으면 치료의 첫 걸음을 내딛은 거라고 하지만, 알코올 중독은 대부분의 환자가 병식이 있음에도, 그 사실이 아무것도 바꿔놓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좀 더 어릴 때는 그런 이야기를 읽으며 솔직히 알코올 중독 환자들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렇게 되니 나 자신도 한심했다.
나는 놀랍게도 그즈음 별 생각을 안 하고 살았다. 그래서 내 기억 속에 그 2년은 2년 정도의 길이로 남아있지 않고 두 달 정도인 것 같다. 정신과 약과 술에 찌들어 살았으니 머릿속이 항상 멍했다. "아니 그래도 생각이 없는 것보단 생각이 많은 게 낫지 않아요?"라는 질문의 답안을 내가 스스로 제공하고 있었다. 아무 생각이 없는 채 두 해가 지나가고, 다시 내 머릿속을 떠돌아다니던 생각들이 한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을 때는 2023년 초였다.
- 5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