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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 Jan 16. 2024

남들이 모른대도 나는 좋아한다

[미공개 취향] 두번째 이야기: 시

 요즘 가장 많이 쓰는 글은 에세이고, 제일 꾸준히 쓰는 글은 소설이지만 사실 나는 평생을 통틀어 생각한다면 시를 으뜸으로 많이 썼다. 문학 장르 중에 어떤 걸 가장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아도 시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누가 대놓고 물어보지 않는 이상 시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데, 시라는 장르는 다들 존재는 알지만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는 찾아보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세상에는 나처럼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 수가 많은 건 아니다. 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시를 누군가에게 추천하기도 그런 것이, 시만큼 취향 타는 장르가 없어서 그렇다. 심지어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좋아하는 시는 다 다르기 때문에 내가 좋다고 타인에게 덥석 내밀 수가 없다. 이쯤 되면 시를 많이 접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게 도대체 뭔 소리야'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근데 정말 그렇다. 그리고 그런데도 나는 시가 좋다. 시를 쓰는 것과 읽는 것 모두 나에게 다른 콘텐츠가 줄 수 없는 감각을 준다.


"왜 책을 읽으세요?"라는 질문에도 많이 하는 대답인데, 시를 읽다가, 내가 그저 추상적으로만 생각해 본 어떤 순간을 글로 완벽하게 표현해 놓은 구절을 보면 숨이 턱 막힌다. '벅차 오른다'는 표현이 제일 적절할 것 같다. 멋진 시를 읽으면 정말 눈물이 주륵 난다. 슬프거나 암울해서 우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작품 자체에 감동을 받은 것이다. 그런 순간 내 마음 속에는 다른 모든 근심 걱정이나 도파민을 잔뜩 분비시키는 자극 거리들이 사라지고 오로지 시의 구절과 나만이 존재한다. 최근에 그런 느낌이 들었던 구절을 하나 소개해 본다.


내일 밤 현실에 따뜻한 천사를 보면서
그곳이 천국이라 생각할 텐데
지금은 이대로 사라지면 어쩌지 걱정하는 내가 있고
어제 들은 음악과 며칠 전 봤던 영화에서도
사라지면 안 되는 것들만 사라져서

네가 웃을 때마다 누군가와 손잡고 걷는 꿈들을 꿨다
우리는 슬픈 것이 닮았고, 피가 달라서 더 슬프다
죄를 안고 함께 목 놓아 울어줄 수 없어서 아름다운 적막을 산다

- We all die alone, 최백규


 이 구절에서는 구체적으로 "사라지면 안 되는 것들만 사라져서"라는 부분이 너무 와닿아서 눈물이 찔끔 났다. 이런 감동은 시를 찾아서 읽을 때 뿐만이 아니라, 어릴 적 국어 책에서 시를 읽을 때도 수시로 밀려오고는 했다. 오죽했으면 모의고사를 풀거나 문제집을 보다가 눈물이 나서 책을 덮은 적도 있다. 그렇게 느낀 시 중에 지금 기억이 나는 것은 기형도의 '빈집'이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 빈집, 기형도

 하지만 세상 모든 일들이 그렇듯 시를 좋아한다고 해서 시를 잘 쓰지는 못하는 것 같다. 평생 시를 썼지만, 엄밀히 말하면 시의 형식을 갖춘 운문을 썼지만 내가 봐도 그저 그렇다. 시라는 건 정말 천재들만 쓸 수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천재들만 쓸 수 있는 것 같아서, 쓰디쓴 거리감을 느껴서 시라는 장르가 더 좋은가 보다. 


 시의 특별한 매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이렇게 쓰니 목숨 걸고 시를 홍보하는 사람이라도 된 기분이다). 시는 번역이 정말 어렵고, 번역을 하면 맛이 제대로 살지 않는다. 소설과 같은 다른 문학도 그렇지만 시는 운율이 살아있는 글이다 보니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하다. 그러한 면 때문에 시가 더 널리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 그 점이 시를 더 아름답게 만들기도 한다. 한국어의 맛을 이해할 수 있는 독자만이 시를 오래오래 곱씹을 수 있다니, 신기한 일이니까.


 그래서 어쩌다 누군가에게 시집을 선물받으면, 게다가 "이 시집을 잘 읽어서 너한테도 주고 싶었어"라는 말을 들으면 특별한 기분이 든다. 나는 알기 때문이다. 어떤 시를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가 타인에게 추천해 주려면, 상대방이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걸. 이 넓은 세상에서 서로 비슷한 사람을 찾았다는 사실에 대한 반가움이 시집 선물을 더 잊을 수 없게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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