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휴가란 게 이런 거였구나
한국에서는 아주 어렸을 적을 제외하면 한 번도 여름휴가를 가본 적이 없었다. 일단 나 자신이 사람 붐비는걸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에 굳이 성수기에 휴가를 보낼 생각이 없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는 휴가를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그도 그럴게 6-8월 사이에 많은 동료들이 갑자기 훌쩍 사라져 홀로 남기 일수였기 때문이다. 홀로 조용한 사무실을 즐기는 것도 좋긴 했지만 이왕 넘쳐나는 연차를 좀 써볼까 싶어 몇 번 여름 끝 무렵에 휴가를 가곤 했다.
나는 바다와 산 중에서 고르라면 산을 고르는 사람이었는데, 막상 바다를 오래 못 갔더니 물이 너무 그리워졌다. 해수욕장은 끔찍이도 싫어했는데 그 파라솔 밭이 그리워질 줄이야. 그래서 나의 첫 번째 여름휴가는 호수였다. 구글 맵에서 사진을 보고 너무 아름다워서 그냥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였는데 실제 풍경은 사진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나만 그 사진을 본 게 아니라는 듯 갔더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말이다. 호수라 모래사장은 없지만 잔디밭이 있고, 짠맛나는 바닷물과 넘실거리는 파도는 없지만 짜지 않아서 더 좋은 맑은 호수 물과 잔잔해서 즐길 수 있는 패들보드가 있다.
호숫가에 널브러진 많은 사람들을 보며 우두커니 서있다가 나만이 홀로 아시안인걸 깨달았다. 괜히 의기소침해 있는데, 상반신 훌러덩 벗어 일광욕하는 사람도 있고 몸을 늘어뜨린 채 서로 오일을 발라주는 노부부도 한가로운 오후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아 여긴 적어도 몰래카메라 걱정은 없겠구나. 깔깔거리며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멀리 호수 위로 패들보드를 슬금슬금 저으며 놀고 있는 커플들을 보자니 나도 순식간에 평안해졌다. 참으로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부서지는 햇살 위로 사람들의 웃는 소리만 들리고, 그렇게 덥지도 않고 습하지도 않은 날씨의 풍경. 몇몇 구석을 카메라에 담고 물에 한번 들어갔다가 나와 몸을 식힌 뒤 돗자리에 누워 책을 펼쳐 들었다. 수영도 좀 하고 낮잠도 자고 간식도 먹고 지루해질 때 즘, 다시 일어나 풍경을 보았다. 그러다 문득, 아 여기에 나만 있는 게 아니라 가족들도 있었으면. 내 친구들도 있었으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 심지어 강아지도 한가로운 여름을 즐기고 있었다. 아무 걱정도 없어 보이고, 자기 휴가 모습을 뽐내려고 사진 찍어대는 소셜미디어 중독자들도 없다. 책을 읽는 할머니, 아이의 수영을 가르치는 아빠의 모습, 맥주를 흔들며 친구와 담소를 나누는 중년의 여자들과 잔디밭에 누워 태닝하고 있는 커플들. 여름휴가를 오래도록 가보지 않았던 나에게 그날의 풍경은 일종의 평화로운 충격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사실 이렇게 살 수도 있었겠구나. 일이 바빠도, 나이가 들어도, 반려견이 있어도, 이런 곳에서 이렇게 한가롭게 휴가를 즐길 수 있었을 수도 있겠구나. 우리가 만약에 이곳에 태어났더라면. 한국이 아니었더라면.
2020년 3월 락다운이 시작됐던 날을 기억한다. 1월부터 한국은 이미 심각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를 걱정하는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동료들을 뒤로하고 3월 중순, 심상치 않은 일일 확진자수를 보고 나 또한 재택근무를 선언하고 집에 칩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이틀 뒤 회사에 전면 재택근무가 시행되었다. 그때부터 계속 여행하지 않고 집에서만 보낸 것이 몇 개월. 드디어 락다운이 종료되고 레스토랑이 다시 문을 열게 된 5월도 지나 보내고 8월 휴가철이 왔다. 언제 국경이 봉쇄될지 모르기에 모든 사람들이 국내 여행을 가고 있었고, 그래서 호수 중에서 사람이 없어 보이는 호수를 골라 차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렇게 다시 찾게 된 호수 여행. 이번에는 산도 있고 호수도 있는 곳으로 갔다. 산 위에 오르니 한 여름인데도 선선한 바람에 으슬으슬 추위가 온다. 시내로 내려와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다가 길에서 우연히 전 회사 동료를 만났다. 아예 호수 바로 앞 호텔 방을 한 달 임대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녀는 호주에서 나고 자랐지만 현재는 이곳에 이민 와 정착해서 살고 있다. 예전 이곳이 시드니보다 더 살기 좋냐고 물었을 때 그렇다고 대답했던 그녀의 말에 적잖이 놀랐던 나는 그녀가 어떻게 휴가를 보내는지 보며 조금 이해가 가는 것 같기도 했다.
이곳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자연도 자연이지만 숙소다. 에어비앤비의 침실이나 욕실에서 산등성이에 걸린 안개를 보며 휴식을 취하자니 이런 집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서 안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밖을 보는 것을 염두에 두고 설계된 집. 목조 주택이지만 춥지 않았고 특히 주인장 부부가 아래층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이렇게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 2층 집 지어서 에어비앤비 돌리면 좋겠다 싶었다. 물론 코로나 같은 것이 이렇게 자주 닥치면 그것도 불가능해질 일이지만 말이다.
에어비앤비를 나와 마을을 걷다가 캠핑장을 보았다. 이웃나라에서 온 캠핑카들이 줄지어 서있고, 그 앞에서 바비큐를 굽거나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이 보였다. 캠핑장 앞에 바로 호수가 있어 언제든 물에 뛰어들 수 있고, 건너편으로 보이는 산새를 보며 이렇게 담소를 나눌 수도 있다. 굳이 이런 곳에 집이 없어도 캠핑카 하나 들고 어디든 다닐 수도 있겠구나. 사실 캠핑카도 가격 보면 헉소리가 나오는 자산 중 하나지만, 이 나라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은퇴 후의 삶을 즐기는 방법으로 택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여기까지 오는데 차로 3시간 반. 더 멀리 가면 국경을 넘을 수 있고, 한 나라를 지나 또 다른 나라로 당도할 수 있다. 내가 원할 때 원하는 만큼 갈 수 있는 자유. 그게 참 부러웠다. 연금도 잘 나와야 하는데, 시간적 여유도 있어야 하는데, 여행할 체력도 있어야 하고 고생을 감수할 의지도 있어야 하는데, 내가 저 나이에 그런 것들을 갖고 있을까?
2021년. 끝날 것 같던 코로나는 결국 끝나지 않았고, 적어도 올해는 백신을 맞았다는 큰 차이가 있었기에 유럽의 다른 나라에 살고 있던 친구가 놀러 와 같이 여행을 가기도 하고 내 생일 즘에는 포르투갈로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2021년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재택의 재발견이다. 리모트 근무가 보편화되면서 전면 재택을 실시하는 회사가 많아졌다. 한 달 살기처럼 아예 다른 나라에서 집을 구해 낮에는 일하고 저녁 즘엔 서핑을 가는 그런 형태의 삶이 가능해졌다. 문제는 세금인데 거주지를 기준으로 세금을 내야 하는 나라가 정해지기 때문에 회사들은 대체로 그런 복잡한 문제를 피하고 싶어 했고, 그래서 3주 이상은 안된다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렇다면 아예 살고 싶은 나라에 옮겨서 미국에 본사를 둔 리모트 회사로 이직하는 방법이 있다. 그렇게 살고자 한다면 생각해볼 만한 나라 중 하나가 포르투갈이다. 스페인을 별로 안 좋아했던 나는 기대 없이 갔다가 완전히 푹 빠지고 왔는데 물가도 저렴하고 음식도 맛있고 문화생활을 즐기기에도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발상 자체가 굉장히 1 세계 마인드이다. 재택근무가 가능하고 영어로 일을 하는 IT 종사자가 미국에서 받을 만한 연봉으로 물가가 싼 나라에 가서 사는 것. 웃으면서 나는 태국 가서 왕처럼 살 거야!라고 말하던 미국애가 생각난다. 사실 그 말은 한국으로 가는 많은 외국인들의 생각이기도 하다. 이렇게 싸고 영어 선생님이 되기 쉽다니! 나는 한국에 가서 왕처럼 살 거야! 그래, 내가 너네랑 똑같아질 순 없지.
잡다한 생각의 밑바닥에서 다시 빠져나와 저녁노을이 지는 도시의 모습과 길거리 버스킹 소리를 들으며 내가 이렇게 이곳에 있다는 것이 너무도 생경하게 느껴졌다. 나는 한국을 나가본 적이 없던 사람인데. 영어 과외도 받아본 적 없었는데. 주변에 외국인이라고는 한 명도 없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홀로 나와있게 된 것인지. 정말 이상하네. 이상하다. 나만 이 풍경에 이질적으로 떨어져 있는 사람 같아. 나는 여기가 더 편하다고 느낄 수 있게 될까?
유명한 5성급 호텔의 콘셉트가 마음에 들어 가족들을 데리고 여행을 계획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호텔은 명성과 달리 정말 엉망이었는데, 이상한 동선, 거지 같은 서비스, 괴랄한 방구조, 불편한 침대, 조악한 바와 카페 등등,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없다더니, 정말 총체적으로 별로여서 가성비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비를 해도 그 값은 풍족한 느낌을 전혀 주지 않았고, 이런 곳에서 여유를 느낄 사람들은 아마 평소에도 여유롭게 사는 사람들 정도일까 싶었다. 나에게 이 비싼 호텔비를 지불한 소비력은 있을지라도 평소라면 이런 곳에 오지 못 했을 내가 정말 마음의 여유를 갖고 싶다면 휴가뿐 아니라 내 일상을 바꿔야겠지. 평일 이 시간에 땅끝으로 내려와 호텔에서 시간을 즐기려면 어떤 직장을 다녀야 했을까? 아니 노동임금으로 가능이나 한가? 근데 그런 돈이 있어도 내가 과연 그 시간을 온전히 즐기고 있었을까? 내게 필요한 건 돈보다 시간이요, 자연이고, 무탈한 가족들이었다. 그것은 아무리 돈을 써도 한국에서 좀처럼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내가 한국에서 가장 많이 들은 건 "한국처럼 돈 많은 사람이 편한 나라가 없어"였는데 솔직히 말하면 전 세계가 다 그런 편이다. 내가 정작 느낀 건 '한국처럼 돈이 많아도 마음 불편한 나라가 없다'는 것이다. 한국에선 금전적 여유가 생겨도 도무지 마음의 여유는 가질 수 없어 보인다. 자존감도 없고 사회공헌 의지도 없는 벼락부자들도 참 많다. 많은 사람들이 '더'를 생각하고, 끊임없는 경쟁과 갈등을 견디고, 언제든 다시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둔 채 살아간다. 그리고 가지지 못한 것들을 끊임없이 바라보도록 만드는 사회적인 분위기도 한 몫했다. 사실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와 같이 인구 밀도가 높은 모든 도시가 그러하다. 모든 종류의 불안들이 사라지지 않았고 아무리 애써보아도 마음은 좀체 편해지지 않는다. 나는 정말이지, 나의 휴가 기간에 이런 걸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느낀 게 많았기에 아마 글을 따로 더 써야 될 것 같다. 이건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