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휴가가 아니었다
첫날부터 택시기사님에게서 TMI 넘치는 오지랖을 받은 뒤 급속도로 피곤해지며 '아 한국 이런 느낌이었지' 바로 느껴졌던 첫 휴가 때는 그래도 한국이 낯설지는 않았다. 갑자기 병원 대기 알림이 카카오톡으로 오긴 했지만, 을지로에 처음 보는 고층 건물이 생겨있긴 했지만, 갑자기 유행하는 음식이 바뀌어있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알던 그 한국, 그 사람들이었다. 생경한 것이 있었더라면 다시 유럽으로 돌아왔을 때다. 어 저게 나랑 매일 얼굴을 마주치던 사람이 맞나? 아시안은 나밖에 없네. 이 도시는 여전히 밤에 어둡구나. 아직 내가 이곳에 적응하지 않았고, 전혀 소속감을 느낄 수 없음을 깨달았던 입국 날을 기억한다. 친구들과 밤새 술을 마시던 그 밤도 그리웠고, 가족들과 했던 마지막 저녁 식사가 생각났다. 내가 유럽에 산지 10개월 남짓. 아직은 갈 길이 멀었다.
격리는 죽을 맛이었다. 격리로 보내는 시간이 아까워서 재택근무도 하고 어학 수업도 들어서 하루를 꽉꽉 채웠더니 피곤해 죽을 것 같았고, 그렇게 하루를 빠듯하게 보내도 주말에는 무엇이든 하며 시간을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2주를 버티고 나니 남은 휴가는 3주 남짓. 이렇게 긴 휴가를 가져본 적이 없었는데도 그 3주는 참 짧게 느껴졌다. 어안이 벙벙한 채로 찍던 QR코드에 익숙해질 무렵, 만남이 잦아지며 나는 급속도로 피곤해졌다. 친구들을 만나면 '이거 해봤어? 이 브랜드 들어봤어? 이 전시 봤어?' 하는 질문들을 퍼부어서 FOMO를 오랜만에 떠올리게 되었고, 각자 스트레스받는 상황을 토로하고 그걸 위로해주느라 누굴 만나든 진이 빠졌다. 이게 휴가가 맞나? 어쨌건 가족들을 보기 위해 온 이유가 가장 컸으니, 부모님 모시고 여행도 가고 조부모님도 뵙고 오고 친척분들도 뵙고 오고 그랬다. 그쯤 되니 이게 출장에 가깝지 않나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코로나 때문에 친한 친구와 가족을 제외하면 만남을 삼갔는데도 3주는 굉장히 바빴다. 그래도 내가 한국에서 그리워하던 것들을 조금씩 하고 갈 수 있었다. 커피를 사들고 청계천을 따라 종로 일대를 거닐고, 서점에 가서 새로 나온 책들을 확인하고, 경복궁 돌담길을 걸으며 계절을 만끽했다. 조용한 밤의 미술관을 즐기고 늦은 밤에 급작스럽게 불러도 나와주는 친구를 반갑게 맞이하고, 남해 바다를 보며 맛있는 고기를 먹었다. 힘에 부치긴 했지만 그래도 결론적으로 좋은 휴가였다. "한국에서 돈 쓰니 너무 좋지? 한국도 여행하면 그렇게 살기 좋을 수가 없어~" 그래 맞아. 그런 것 같네. 웃으며 고기를 뒤집고 술잔을 들었다. 지하철에서 저주했던 일상도, 망쳐버린 관계에 후회했던 날도, 괴로움이 더 컸던 만남도, 회사에서 스트레스받던 기억도 이제 좀 희미해진 것 같구나.
올해는 정말 낯설게 느껴졌다. 첫날부터 보게 된 로봇 바리스타. 몇 년 전 실리콘밸리의 햄버거 가게에서 봤던 로봇이 어느새 한국의 프랜차이즈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처럼 찾아올 때마다 휙휙 변화무쌍하게 모습을 바꾼 서울 때문에 생경한 것도 있지만 내 가치관이 너무 변해버린 탓도 컸다. 이제 사람들이 입고 화장하는 게 다 똑같아 보인다. 한국은 한층 더 일본에 가까워져 있었다. 개성 넘치는 패션들이 불황을 만나 깔끔하고 무난한 소위 무지 스타일로 변한 것이 보도되던 게 몇 년 전. 여기에 한국은 중국인들처럼 한층 고가의 브랜드로 포인트를 주는 그런 것들로 진화했을 뿐 일본의 행보와 크게 다르진 않았다. 로고가 무식하게 박힌 싸구려 소재의 럭셔리 브랜드들이 지하철에도 종종 보인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 문화에서 나는 제법 자유로워졌지만 그런 나를 바라보는 친구들은 여전히 불편하다. 시술부터 화장, 옷, 머리까지 아쉬운 듯 나를 바라본다. 올해도 '이거 해봤어? 이 제품 써봤어?'류의 질문들이 이어진다. 올해는 유독 해외 브랜드 얘기를 많이 들었다. 정작 유럽사는 나는 들어본 적도 없고 관심도 없는데, 많은 친구들이 해외 직구를 하고 있다. 나는 국산 옷이 제일 좋던데...? 한국 세관은 여전히 관대하구나.
부동산과 주식 얘기가 빠지지 않는 대화도 씁쓸했다. 한국에서 회사를 다닐 때도 식후 커피를 마시며 창밖에 보이는 아파트들의 가격을 읊던 사람들이 신기했는데 이제 비트코인/주식까지 곁들여 내 또래 사람들은 모두 껄무새가 되어 있었다. 커리어를 위해 피도 회사 로고 색일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과 유럽 애들이 얼마나 게으르고 무능력한지 얘기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헛웃음이 났다. 나는 언제부턴가 이런 것들이 너무 노예 마인드라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에 한 귀로 흘려들었다. 정말 재밌는 것이, 미국에 사는 한인과 유럽에 사는 한인은 정말 천지차이다. 회사를 얼마나 대충 다니는지, 공부나 사이드 프로젝트는 안 하고 만날 휴가나 가는 유럽인들이 너무 한심하다고 말하면서 미국에서 버텨낸 자신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여긴다. 많은 한인 이민자들이 자신이 정착한 나라를 자기와 동일시하곤 하는데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개인주의를 죽어도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 하긴 미국은 개인주의라기엔 너무도 집단주의이긴 하지만 말이다. 몇 년 전까지도 make america great again 같은 게 통했으니까. 국제 회사들이 이민자를 고용하는 이유는 여러 개가 있지만, 값싼 노동력으로 비자 연장을 위해 무조건적인 충성을 바치는 탓이 크다. 능력은 다 고만고만하니까. 이런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닌데 다 알고 나면 회사의 방침에 따라 승진하려고 악을 쓰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깨닫게 된다. 삶에 주인의식을 갖고 있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살든 그건 그 사람의 선택이다. 그런데 마치 자신의 방식이 진리인 것처럼 강요하고 남의 방식을 잘못됐다고 깎아내리는 건 참 기만적이다.
서양이 요즘 얼마나 무식하고 한국이 얼마나 대단한지, 오징어 게임이 얼마나 유명했고 요즘 블랙핑크가 얼마나 세계적으로 핫한지 얘기를 한다. 그래? 나는 그 콘텐츠들이 우리가 얼마나 미성년 노동 착취에 관심이 없고 인종차별과 인권의식에 무지한지 보여줘서 조마조마한데. 세계 기준으로 욕먹기 시작하면 오히려 나아질 것 같기도 하다. 남녀 갈등은 너무 심해져서 놀라울 정도다. 페미니즘을 꺼내면 혐오자 취급을 받는다고?? 나는 올해 여성의 날에 회사에 기여한 바로 추천사도 받았는데??
많은 한인 해외 체류자들이 작년과 올해 한국으로 돌아갔다. 해외에 살아보고 싶어서 결정했던 나의 해외살이도 사실 이민을 염두에 두고 한 결정은 아니었다. 경쟁 조금 덜 심한 데 가서 외화 벌고 다시 돌아가려는 생각이 컸는데, 그때즘 내가 알던 한국이 얼마나 변했을는지 걱정이 든다. 한국에 있는 동안 시위도 많이 나가고 투표도 열심히 하고 그랬는데, 30년 뒤 이 나라의 미래는 정말이지 모르겠다. 인권은 제자린데 인간이 아닌 것들의 가치만 높아지는 것 같아서. 아파트 가격과 내가 다니는 회사의 가치가 올라가면 그곳에 머무는 나의 가치도 올라갈 것 같으냐면 전혀. 근데 마치 그런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한국에서 정작 한국인들은 보금자리를 잃고 사람 자리에 기계와 돈만 남아 가는 것 같다. 살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인지 돈을 벌기 위해 사는 것인지, 이 간단한 질문에서 한국은 미국에 가깝다. 한번 주객이 전도됐고, 그걸 느낄 겨를이 없으니 아마 한국의 미래는 필라델피아의 노숙자로 가득 찬 그 거리에 더 가까워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내 모든 얘기는 '주객전도'에 대한 것이다. 그때의 나는 어떻게 살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돌이켜보면 지금은 의아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많다. 그걸 전하면, 한국의 미래가 좀 더 이상적인 것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 내가 바라는 세상과 주류가 바라는 세상은 같은 모습일까? 요즘 나는 그 둘이 점점 멀어진다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