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지 뭐겠어요
비행기가 이륙할 때, 혹은 착륙할 때, 어느 나라를 가든 창가의 승객들은 하늘 위의 풍경을 확인하곤 한다. 줄지어진 저택과 가로수 사이로 보이는 도시 풍경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도 있고,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처럼 총총이 보이는 도시의 불빛에 마음을 뺏기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야경, 한국의 야경은 그나마 낫다. 하지만 대낮의 풍경은 그냥 아파트 천지일 뿐.
자 서울을 떠나 여행을 가보자! 운전을 하고 다다르면 자 이제 온통 초록빛이겠지? 천만의 말씀. 아파트가 줄줄이 나온다. 지긋지긋하게도 짓는다. 아니 한 5년 전에도 여기 지었던 거 같은데 아직도 지을 땅이 남아있나? 생각이 들 정도로 빼곡하게도 짓는다. 지난 2년간 나에게 연락한 모든 지인의 하소연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한 주제인 부동산과 아파트 값은, 해결책이 이것뿐인가 싶을 정도로 '더 지읍시다'로 해결 보려는 것 같다.
내가 자란 곳은 한때 밭이었다. 전철역 하나를 앞에 두고 고층 건물이라고는 우리 집 밖에 없던 그곳이 어떻게 '강산이 변한다'라는 말처럼 뒤집어질 수 있는지를 나는 똑똑히 보고 자랐다. 한때 논밭에 아이스링크장도 만들어지곤 했던 동네는 '철거 반대'라는 빨간 스프레이 자국의 담벼락들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유령의 집이라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듣고 아이들과 찾아갔던 그 집은 그저 재개발 계획으로 버려진 집들이 었을 뿐.
새로운 시장의 구호는 신도시 아파트 분양완료였고, 그건 제법 먹혀 어느새 아파트로 빼곡해진 신도시는 이제 구도시가 되었다. 하늘 위에서 징그럽게 보이던 아파트들이 아래에서 본다고 딱히 달라지진 않는다. 이제는 저것도 모자라 30층, 78층씩 짓고 앉았으니, 미래는 어찌 되려나 모르겠다.
"아파트값에서 아파트 원자재 값만 고려한 실제 값이 얼만 줄 알아요 여러분?"
강단 위의 교수님이 말씀해준 그 가격은 아직도 뇌리에 박혀 있다. 요즘 지어진 아파트들은 그래도 썩 나쁘지 않아서 그것보단 비싸졌을 것이다. 스마트홈도 있고, 일조량 골고루 받도록 짓고 내진설계도 좀 하고 이것저것 더 추가되었겠지. 그러면 무엇하는가, 어차피 층고는 낮고, 창틀, 벽지, 베란다 등 건물 자재는 여전히 싸구려이며, 취약한 방음은 여전하다.
'캐슬'이 들어가서 장학금을 반려당했다는 썰이 있는 그 아파트 외에도, 오랜만에 간 서울에는 새로 생긴 고급 아파트 단지가 더 많아졌으며, 올해도 여전히 집값 불평을 들었다. 대학교 일대 내가 자주 가던 식당들도 모두 재개발로 밀어져 사라졌으며, 이제 내 고향마저 아파트 단지로 밀리게 생겼다. Since 2000도 달기 힘든 이 나라는 모든 것들을 뒤엎어버리니 내가 나이가 들면 뭘 추억할 수 있을지 짐작이 안된다. 북한산이나 올라갈걸 그랬다. 설마 그 산을 밀지는 않겠지?
"용적률 꽉꽉 채워서 짓는 거지 뭐"
"클라이언트가 욕실 크기 더 줄여서 방 몇 개 더 늘려달래. 진짜 내 직업에 회의감 들어. 그런 집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 변기 안에서 샤워하게 생겼어"
어떻게 살긴, 기생충 안 봤냐. 우리가 가진 최선의 주거라는 저 아파트는 층고도 낮고, 참 좁다.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구조로 살고, 비슷한 이웃끼리 모여 살고, 거기에 심지어 브랜드 이름이 떡하니 붙어 있고,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이 부동산 사이트에서 주소만 대면 그 사람의 자산 소득을 측정할 수 있게끔 편리함도 제공해주는 저 아파트도 결국에는 한국인이 선택한 주거다. 도시 계획 부작용, 부동산 시장의 거품, 집단 이기주의로 생긴 사회 문제 등 많은 것들이 아파트라는 주거 형태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초등학생들끼리 임대니 빌라니로 서로 구별 짓고 친구를 따돌린다는 것을 들은 게 이미 몇 년 전. 지금 더 심해졌으려나?
사실 건축법이 변하면 개선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기본 층고를 높이고, 일조량을 일정 이상 확보하게끔 짓게 하고, 층간 소음이 없도록 벽과 바닥 최소 두께를 특정하고, 불법 증축을 막고 최소한의 침실/욕실 크기를 정해두고... 법이 할 수 있는 것들이 참 많이 있었을 것이다. 건축뿐 아니라 세입자 보호법 등 기타 법적인 장치들을 생각하면 끝도 없다. 하지만 이미 아파트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그만큼 투자한 이 아파트라는 자산이 더 떨어지지 않길 바라기 때문에 이런 변화는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우리나라는 가난했다' '전후에 이렇게 주거를 보급한 것도 기적이다' 등등. 세계대전을 똑같이 겪은 유럽을 보고 그 전후에 지어진 건물들을 봐도 글쎄, 그것 말고도 많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건축법의 차이, 정부 주거 정책의 차이로 생긴 주거 수준의 차이는 정말 하늘과 땅만큼 벌어진 것 같다.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대부분이 그런데, 한국은 정말 유독 아파트 공화국이 되었다.
유럽이라고 다 좋은가 하면, 같은 유럽 내에서도 지옥인 곳도 많다. 런던의 공실률은 말할 것 없이 높고, 파리는 에어비앤비와 부동산 투기로 집세가 말도 안 되게 높다. 몇몇 국가만 정부 주거 보급률을 높게 갖고 있으며, 세입자를 보호하고 에어비앤비를 규제한다. 외국 자본의 유입으로 유럽의 어느 수도든 간에 높은 주택값은 하나같이 갖고 있는 문제이지만, 대부분의 아파트들은 튼튼하게 지어진 오래된 빌딩을 보존한 것이거나 전후에 보급된 정부 주택이고, 그것들의 일조량과 집 자체의 크기로 보면 한국의 아파트보단 쾌적한 편이다. 물론 사람마다 다른 기준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엘리베이터의 유무와 도어록으로 이런 낡아 빠진 곳에서 어떻게 사냐고 할 수도 있고, 가끔 일어나는 가스 폭발의 현장에 가본 나로서도 오래된 아파트에 사는 건 공포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적어도 이곳에는 내가 사는 아파트의 가격을 검색해서 나를 무시할 이상한 지인도 없고, 요리한 냄새가 침대에 밸까 걱정해야 하는 말 그대로의 '원룸'도 없고, 옆집 화장실 물 내려가는 소리에 고통받는 불면의 밤도 없다. 언젠가 한국에 돌아간다면 아파트에 사는 것 외에 답이 없을 확률이 높은데 그 낮은 층고와 이기적인 이웃들의 집값 올리기 운동과 못생긴 아파트 단지 풍경들을 매일 봐야 되는 걸 생각하면 참으로 돈 쓰기가 싫다. 저게 16억이라고? 저게 48억이라고??? 어릴 적엔 고층 빌딩을 너무도 사랑하여 뉴욕 같은 풍경에 낭만이 있었는데, 이제 시야를 가리는 고층 빌딩과 아파트들이 탐탁지 않기만 하다.
지금 사는 동네는 바로 옆에 아주 큰 공원과 하천이 있다. 살고 보니 나는 물 흐르는 곳을 아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고, 강변을 산책하면 마음의 평화가 와서 자주 나가곤 했다. 윤슬을 멍하게 10분만 보아도 무언가 치유되는 기분이 드는 그런 곳. 아일랜드 전통악기 같은 것을 연주하는 사람도 있고, 두 나무에 해먹을 달아 독서하는 사람도 있고, 삼삼오오 모여 와인 한잔 하는 사람들도 있는 그 강변길을 참 좋아했다. 집에서 7분 정도 거리에 있는 큰 공원은 아마도 굉장히 오래됐을 나무들이 쭉 이어진 산책길을 따라 걸어가면 따뜻한 뱅쇼를 먹을 수 있는 가게가 있고, 좀 더 나가면 여름마다 멋진 인디영화를 상영하는 야외 영화관이 나온다.
때로 공원 근처는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넓은 공원은 해가 지면 무법지대로 변하니까. 그러니까 대공원 바로 옆보다는 조금 떨어진, 그런 안전한 곳에 살고 싶다. 그곳은 아마도 조금 더 비싼 곳이겠지. 자연을 곁에 두고 생활하면서도, 도서관이나 문화시설, 큰 병원시설이 멀지 않은 도시. 그런 대도시는 세상에 몇 개 존재하지도 않는다. 공기 좋고 물 좋고 사람들 여유로운 그런 도시의 동네에서 살고 싶다. 역세권이라 어린 시절부터 들어야 했던 시끄러운 트로트와 가요 소리, 취객들이 길거리에서 싸우는 소리, 가끔 타이어가 펑크 나서 기절할 듯 큰 소리를 내는 버스들과 성질 더러운 운전자들의 경적 소리는 이곳에선 들을 수 없다. 내 잠자리를 방해했던 네온사인 등불도 없다. 창문에서 밤하늘을 보면 별이 쏟아진다. 그런 하늘은 도시를 한참 지나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는데, 수도 한 복판에서도 나는 별을 셀 수가 있다. 다행히 트램이 지나는 대로변을 창가로 두고 있지는 않아서, 밤에도 아주 조용하다. 가끔 교회의 종소리가 멀리서 들리긴 하지만. 나의 사랑스러운 세르비안 이웃이 이상한 가요를 틀고 노래를 부르긴 하지만. (근데 이사 간 것 같다. 생각해보니 2년 동안 못 들었네) 내가 사는 집에 필요로 했던 것들이 느껴진다. 당연한데 가질 수 없었던 것들. 한국에서도 이런 걸 누릴 수 있는 집은 많았을 것이다. 조금 더 비쌌을 것이고 여전히 직장과의 거리는 멀었겠지만 말이다.
날씨를 느낄 수 있는 창 밖의 풍경. 식물을 기를 수 있는 충분한 일조량. 조용한 이웃. 답답하지 않은 3미터 가까이 되는 층고와 벽으로 구분되어 있는 부엌과 욕실을 가진 구조.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한 실내. 이웃의 소음을 참아내지 않아도 되도록 방음 잘 되어있고 바닥재의 두께가 충분한 건물. 시내 중심가에서 멀지 않고, 발이 닿는 거리에 마트와 병원이 있는 곳. 중정에는 계절마다 변하는 나무가 있고, 더 큰 자연이 그리울 때는 갈 수 있는 공원과 산책길이 있는 곳. 직장까지 30분이면 도달하는 곳. 맛있는 커피를 파는 카페와 빵집이 있는 곳. 그래 난 이런 게 필요했던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