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유럽 여행, 낯선 이로부터의 친절

내 인생 최고의 레드 오렌지 주스

by Brightly


고시에 합격하고 연수원 입소를 기다리던 어느 날. 다른 사람들은 유럽으로 미국으로 배낭여행도 가고 하는데도, 그 당시 나는 그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여행을 위해 마이너스 통장을 뚫는다는 것이 왠지 모르게 부담스럽기도 했고, 그런 여행을 다녀와도 되는 건지 확신이 없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 잠시 내가 몸을 의탁하고 있던 집의 권사님께서 본인이 돈을 빌려줄 테니 여행을 다녀오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때 그 말씀이, 왠지 하나님께서 내게 여행을 다녀와도 괜찮다고 말씀하시는 것만 같다고 느꼈다. 그래서 - 돈을 빌리지는 않았지만 - 모아두었던 돈을 탈탈 털어서, 7박 9일쯤 되는 유럽 패키지여행을 등록했다. (배낭여행 혹은 자유여행을 가기에는 일정도 여의치 않았고,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이라 용기도 나지 않았다.) 비록 내 주머니에서 돈이 나가긴 했지만, 그 여행은 내게 감사함 그 자체였다. 어쩌면 사치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차마 발을 내딛지 못했던, 유럽으로의 여행.


여행은 영국항공을 타고 런던, 파리를 거쳐 스위스 알프스 산맥에 올라갔다가 이탈리아 피렌체, 베네치아, 로마를 거쳐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여느 패키지여행이 그렇듯이 매우 바쁜 일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여행이 그저 선물같이 느껴지기만 했다. 시작부터 끝까지, 감사한 마음으로 다녀왔던 여행. 그리고 비록 7박 9일이라는 짧은 일정이기는 했지만, 추억이 많이 남는 여행이었다. 문득 이 밤에, 그 추억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고 싶어 져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비행기에서 찍은 창 밖 풍경


영국항공을 타고 영국 런던으로 행하면서, 나는l너무너무 신이 났다. 운 좋게도 비상구 쪽 좌석을 얻어서, 비상사태에 승무원들을 돕겠다고 찰떡같이 약속한 후, 맛있는 영국 맥주 - London Pride라는 이름의, 매우 매우 진하고 맛있는 맥주였다 - 도 마시고, 스튜어드가 학생이냐고 말을 걸기도 하고, 길지만 즐겁게 비행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열 시간이 넘는 비행을 거쳐 도착한 런던. 일 년 중 맑은 날이 거의 없다는 영국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맑은 하늘과 햇살이 나를 반겨주는 듯했다. 영국 근위병도 보고, 사진도 찍고... 유럽에서 (어쩌면) 가장 맛이 없다는 영국 음식 - 당연히 피시 앤 칩스 - 도 먹고... 대영박물관을 짧지만 임팩트 있게 관람하고.


이렇게나 화창한 런던이라니!
유명하디 유명한 런던 시계탑
급하게 관람했던 대영박물관... 너무 멋있어서 고개를 꺾고 걸어 다녔다

그렇게 짧게나마 런던을 만끽한 후, 우리는 일정상 프랑스 파리로 향했다. 그런데 프랑스는 날씨가 흐렸기 때문일까? 에펠탑과 탑 위에서 본 파리 시내는 물론 좋았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게 큰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호텔의 맛있는 커피와 빵이 가장 인상 깊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너무 짧은 일정이라 그랬겠지만, Emily in Paris, 또는 The Devil wear Prada, 와 같은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느낄 수 있었던 파리의 낭만은 안타깝게도 느낄 수 없었다. (역시 파리의 낭만은 멋진 이성이 있어야 가능한 것인가?... 농담이다.) 오히려 테제베를 타려는 와중에 소매치기를 당한 경험이 - 아이러니하게도 - 더욱 인상적이었다.

에펠탑에서 찍은 파리 시내 전경... 오밀조밀 예쁘다

소매치기 얘기를 본격적으로 해볼까 한다. 파리에서 1박을 하고, 생각지 못한 맛있는 커피와 빵을 즐긴 후, 새벽 기차를 타러 기차역으로 향한 우리 일행은, 때아닌 소매치기로 인해 난관에 봉착했다. 일행 대부분은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이었는데 - 내 또래는 나를 제외하고 두 명뿐이었다 - 아저씨 한 분이 한 눈을 파는 사이에, 소매치기가 여행가방을 들고 튀려는 것을, 가이드가 발견하고 잡은 것이다. 그리고 그 장면을 사복 경찰이 발견한 데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프랑스어에 능숙한 소매치기들이 경찰들에게 그 가방이 본인의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가이드는 열심히 그 가방이 우리 일행의 것임을 피력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경찰은 - 어쩔 수 없었겠지만 - 소매치기들과 가이드와 그 가방의 실제 주인인 아저씨까지, 모두 함께 경찰서로 가서 진술을 해야 한다며 그들을 데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일행이 타야 하는 기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가이드는 급기야 울며 불며 경찰들에게 지금 이 기차를 타야 한다고 얘기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가이드와 일부 일행은 프랑스 경찰과 함께 경찰서로 향했고... 나를 포함한 나머지 일행들은 가이드 없이 기차에 탑승하게 되었다.


그리고 모두가 불안해하던 그 상황에서 나는 무언가 책임감을 느꼈던 것 같다. (어찌 보면 참 피곤한 성격이다...) 그래서 스위스를 거쳐 이탈리아에서 - 스위스에서는 한국인 가이드가 잠시 동행했다 - 가이드 없이 피렌체로 향하게 되었을 때, 나는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자의 반 타의 반 이탈리아인 운전기사분과 의사소통을 전담하게 되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도와달라는, 가이드 언니의 간곡한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일행 중에 영어과목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있었지만, 그녀는 나서고 싶지 않아 했다.

스위스 산 중턱의 어느 마을
눈이 가득 쌓인 알프스 산맥

앞서 말했듯 어찌어찌 스위스에서는 현지에 거주하는 한국인 가이드가 동행해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스위스에서 이탈리아 피렌체로 가는 일정에는 가이드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속도로를 여섯 시간 정도 타고 가야 하는데, 그 시간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우리 일행과 이탈리아인 운전기사뿐이었다. 그리고 그 여섯 시간 동안, 나는 - 같은 여행객인 나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당연하게 요구하는 일행들로 인해 - 적지 않게 당황스러운 순간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어떤 분들은 차를 타고 가는 시간이 길어져서 지루해지자 나에게 '가이드처럼 재밌는 얘기를 해달라'라고 요구하셨으며, 고민고민하던 내가 (당연히 나는 가이드가 아니니까 그분들을 재미있게 해 드릴 이야기거리가 없었다) 많이 심심하시면 한국에서 가져온 여행책자를 읽어드리면 어떻겠냐고 하자 그건 재미가 없다며 고시 공부한 얘기를 해 보라고 하시기도 했다. 그리고 슬프게도 아무도 그분을 말리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나는 잔뜩 진땀을 흘렸다.


무슨 성당이었는데... 성 바오로 성당이었나?

게다가 일행 중 영어 선생님이자 나와 동갑이었던 여자애는, 내가 이것저것 애쓰고 돕는 모습이 마뜩잖았는지, 내게 '그냥 가이드로 전향하지 그래?' '너는 돈 내고 와서 왜 사서 고생해?'라며 잔뜩 비꼬기도 했다. 내가 너무 오지랖이 넓었던 걸까...? 나는 그저 이 여행이 감사 그 자체였기에, 돈을 낸 만큼 대접받거나 하는 것을 신경 쓰기보다는 되도록이면 즐겁게, 내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은 도우면서 여행을 하고 싶었을 뿐인데... 사람들은 왜 이토록 무례한 걸까? 그날 밤 나는 숙소에서 울고 말았다.

그 와중에 너무나 아름다운 베네치아... 물에 잠기고 있다고 하는데 부디 내가 다시 갈 때까지 무사하기를

그렇게 속상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던 다음날, 나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위로를 받았다. 우리는 피렌체에서 베네치아로 이동해야 했는데, 잠깐 들렀던 휴게소에서 가이드 언니가 (다행히도 문제없이 잘 합류했다) 내게 붉은 빛깔의 주스 한 잔을 내밀었다. 이탈리아 특산품인 레드 오렌지 주스였다. 그 자리에서 착즙 해서 먹는 거라 매우 신선하고 몸에도 좋다고, 한잔씩 꼭 사 먹어보라는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도 여행 자금이 넉넉지 않아 고민하고 있었던 차였는데, 가이드는 운전기사 아저씨가 사 주는 거라고 하며 주스를 내밀었다. 아저씨가 가이드 언니에게, 내가 가이드가 없는 동안 애를 많이 쓴 것 같다고, 주스를 사 주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운전기사 아저씨는 한국말도 모르고 운전만 하셨는데도, 어떻게 그걸 아셨는지 모르겠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으로부터의 생각지도 못한 배려와 친절에, 나는 한편으로는 놀랐고 한편으로는 너무나 감사함을 느꼈다.


내 마음을 따스하게 녹여 주었던 레드 오렌지 주스... 이 여행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난다.

가이드가 해 준 얘기로는, 이탈리아 운전수들은 돈을 무척이나 밝히는 편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운전기사 아저씨는 나에게 여러 번의 친절을 베풀었다. 말없이 레드 오렌지 주스를 사서 건네주고, 버스 앞 쪽에 여행객들에게 팔기 위해 가져다 놓은 물과 맥주를 내가 돈을 내고 가져가려고 할 때마다 웃으면서 돈을 내지 못하게 했다. 어쩌면 별 거 아닐 수도 있지만, 당시 상하고 지친 마음이었던 내게는 아저씨의 그 작은 친절과 배려들이 어찌나 따스하게 다가오던지... 나는 고민하다가 내가 가져온 한국 음식들과, 선물이 될 만한 이것저것들을 예쁘게 포장해서 감사함을 표현한 쪽지와 함께 드렸다. (돈이 아니라서 별 가치가 없었을 수도 있지만, 가족들이 있다고 했으니까 행여라도 좋은 선물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로마로 가기 전 들른 도시였는데, 어느 도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벌써 6년 전 여행이니 어쩔 수 없나.
바티칸. 성경에 나온 그대로를 본 따 만들었다고 하는 성 베드로 성당.

짧은 일정이었지만 잠도 줄여서 여러 나라, 여러 도시를 거쳤던 유럽으로의 패키지여행. 이탈리아는 꼭 다시 한번 가고 싶다... 지금과 같은 시기에, 부디 아저씨와 아저씨 가족이 건강하게 잘 계시기를 기도하며, 이만 글을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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