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녀들을 어느 겨울 양양의 한 펜션에서 처음 만났다. 그녀들은 각기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뮤지컬 배우들이었다. 20대 중반을 갓 넘긴 듯한 싱그러움과 화사함을 지닌 그녀들은,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저녁, 무려 한 시간에 달하는 라이브 공연을 준비해서 여러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 보수를 받고 하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녀들이 얼마나 그 공연에 애정을 갖고 준비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숨죽인 채 그녀들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그녀들이 참 멋지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한 명은 맑고 울림이 좋은 목소리를 갖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분위기 있고 깊은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각기 다른 음색이 조화를 이루었고, 그녀들의 밝음과 차분함도 역시 조화를 이루었다.
그녀들과 보낸 시간은 1박 2일 남짓이었다. 내가 그 펜션에 도착하고 얼마 있지 않아서 그녀들은 떠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지는 못했지만, 그녀들이 상당히 인상 깊었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분야에서 일을 한다는 것. 어쩌면 안정적이지 않아서 힘들 수도 있는 그 일에 애정을 갖고, 여러 가지 것들을 시도하며 꿈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녀들의 모습이, 참 멋있어 보였다. 그렇게 그녀들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간직한 채, 그녀들과 SNS를 교환한 후 다시 만나자든지 하는 기약 없이 그녀들을 떠나보냈다.
그 후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나는 그녀들의 삶을 SNS를 통해 만날 수 있었다. 짧은 글과 사진, 영상들을 통해 우리는 때로는 서로 공감을 표현하고 때로는 대화를 하기도 하면서, 여행에서의 짧은 인연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 인연을 이어가던 어느 날 밤, 나는 그녀들을 집으로 초대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궁금했다. 그녀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서로 아는 것이 거의 없지만, 맛있는 음식을 함께 나누면서 그녀들과 대화를 나누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한 편에서는 '서로 분야가 너무 다른데... 할 말이 없어서 어색해지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도 조금 있었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 보고 싶었다. 다행히도 걱정보다는, 서로의 만남이 어쩌면 좋은 자극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컸다.
그녀들은 감사하게도 내 초대에 응해주었다. 우리는 어느 토요일의 다소 이른 저녁, 나의 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고맙게도 그녀들이 딱히 가리는 음식이 없었기에, 메뉴를 어렵지 않게 고를 수 있었다. 와인을 마시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양식 위주로 준비를 했다. 최근 내가 너무나 좋아해서 자주 먹는 아보카도를 넣은 어린잎 시금치 샐러드, 미리 만들어두기에 좋은 트러플 바질 페스토 냉 파스타, 언젠가 어느 식당에서 먹어보고 '나도 만들어봐야지'하고 생각했던 소고기를 얹은 구운 가지 요리, 고기가 빠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준비한 호주산 목초육 안심 스테이크에 곁들임용 아스파라거스. 그리고 가격 대비 맛이 훌륭한 와인. 그 후 나는 그녀들에게 디저트와 음료를 부탁했다. 그녀들은 흔쾌히 응해주었다
오늘의 메뉴
열심히 손님맞이 준비중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살다가, 멋진 저녁 시간을 보내기 위한 준비를 갖추고 모였다. 그녀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 내가 부탁했던 디저트와 음료 외에도 - 선물을 가지고 왔다. 너무나 멋진 제목의 책 - 정한경 씨의 '안녕, 소중한 사람'이라는 책인데, 표지에 '한 순간도 당연하지 않은 당신에게'라는 문구가 마음에 와 닿았다 - 과 오랫동안 고심한 티가 역력한 와인. 그것도 너무 기뻤는데, 정성스럽게 쓴 쪽지와 카드가 들어있어서 정말 많이 놀랐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작은 편지와 카드로 인해, 나는 감동을 받았다.
나는 그날 밤 그녀들과 음식을 함께 하고, 와인을 함께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이야기도 음식도, 정말 좋았다. 다행히 내가 준비한 음식도 맛있게 잘 되었고, 그녀가 준비해 온 치즈케이크도 너무 훌륭했으며, 또 다른 그녀가 고심해서 골라온 와인도 좋았다. 조심스럽게나마 '풍성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여도 될만한 저녁이 아니었나 싶다.
건강하고 화려하고 풍성했던 식탁
우리는 서로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나누며, 서로 공감하고, 위로하고, 다양한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때로는 추억을 나누고, 또 그러다가 살아가는 고충을 이야기하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는 다양한 시도에 대해, 미래의 기대감들을 나누고, 함께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진로를 고민하던 순간들도 이야기하고, 지금 고민하는 것들과 새롭게 준비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나누었다. 서로의 건강 상태 - 우리는 공교롭게도 셋 다 위와 장이 좋지 않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 에서는 특히 공감을 하게 되었다. 코로나로 인한 변화들도 나누면서, 힘든 과정을 겪고 있는 것만큼은 모두가 같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조금은 진지하고 무거운 주제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4.3 사건, 한미동맹, 통일에 대한 것들까지. 나는 그녀들의 탐구심에 대해서도 적지 않게 놀랐다.
그녀들과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또 다른 바쁜 하루를 보낸 후 책상에 앉자, 그녀들이 남기고 간 편지와 책이 눈에 들어왔다. 꾹꾹 눌러서 쓴 듯한 편지의 글씨체가 눈에 박혔다. 나를 생각하며 골라준 책의 제목이 마음에 와 닿았다.
그러다가 문득, 이 시가 생각이 났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ㅡ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방문객 - 정현종
언젠가 교보문고 앞에도 걸렸을 만큼 유명한 시이고, 누군가 프로필 사진으로 해 둔 것도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시의 구절구절이 이토록 와 닿았던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들을 만나고, 나는 그냥 그녀들을 만난 것이 아니라 그녀들의 일생을 만난 기분이 들었다. 그녀들의 -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 마음을 만난 기분이 들었다. 그런 마음을 더듬어볼 수 있는 바람, 필경 환대의 마음을 느꼈다
그래서, 이 만남을 조금이나마 더 간직하고자 이렇게 글을 적고 있다. 쓰고자 했었던 다른 주제들의 글들을 왕창 다 미루고, 이 글을 쓰고 싶었다.
이 밤, 조금 감성에 젖어, 꽃 같은 그녀들의 아름답고 강하고 용기 있는 인생, 그리고- 부서지기 쉬운, 부서지기도 했을 - 마음을 향해, 환대와도 같은 바람을 보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