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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싱클레어 Mar 01. 2020

여러 개의 얼굴

[독서노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

북클럽 '문학산책'의 첫 번째 책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이다. 이 책은 독일 문학의 최고의 시인 중 한 명으로 추앙받은 릴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나의 머릿속에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그가 지은 시들을 보면서 나도 예전에 한 번쯤은 스쳐 지났던 작가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의 "별 헤는 밤"에도 그의 이름이 언급이 되었다는 것을 다시 보면서 말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검색해서 그의 시를 읽으니 이 분은 사람의 기분 혹은 감정을 잘 읽고, 그것을 디테일하게 잘 살리고, 언어에 여백을 두면서 감정 전달을 잘하는 시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왜 릴케의 시를 좋아하는지, 당대에 사람들이 릴케의 시에 열광했는지 이해가 된다. 전체주의와 전쟁의 위기 가운데 개인이 사라지고, 집단의 이익만 강조되던 시기에 한 사람, 나의 감정을 표현해 주는 릴케를 통하여 사람들은 해방감을 느꼈을 것 같다. 나 자신이 어떤 정치적 이익을 위해 소모품으로 버려져야 하는 도구가 아니라 감정이 있고,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짧고, 함축된 언어를 사용하여 운율이 있는 시는 쉽게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생전에 큰 인기를 얻었을 것이다.


시인이 지은 첫 번째 소설 "말테의 수기"는 그의 시와 다르게 접근하기 힘든 책이다. 통일성이라곤 찾아보기가 힘들기 때문에 읽기가 어렵다. 그리고 릴케만의 구체적인 지명과 사람들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기에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이 책을 읽기 전에 먼저 그가 지은 시들을 읽고, 그의 표현법에 익숙해졌더라면 좀 더 수월하게 이해가 될 것이다. 나는 먼저 "말테의 수기" 읽고, 그의 시들을 읽으니, 그의 시들을 먼저 읽는 것이 이 책을 이해하기가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책의 독서 노트에서는 먼저 그의 시 중에 마음에 와 닿는 시 한 편을 소개하고, "말테의 수기" 중 딱 한 꼭지만 따서 그 부분에 대해서 나의 생각을 적고자 한다.


살로메에게 바치는 시

                                                     – 릴케-


내 눈을 감기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으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내 팔을 꺾으세요
나는 당신을 가슴으로 잡을 것입니다.


심장을 멎게 하세요
그럼 나의 뇌가 심장으로 고동칠 것입니다.


당신이 나의 뇌에 불을 지르면
그때는 당신을 핏속에 실어 나르렵니다.


이 시가 마음에 와 닿은 이유는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을 때 그 사람이 나의 온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고 있어서, 그 사람과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연결되고 싶어 하는 간절한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눈을 감아도 그 사람 얼굴이 떠오르고, 귀를 막아도 그 사람의 달콤한 목소리를 듣고 싶고, 발이 없어도 그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고 싶고, 입이 없어도 그 사람을 마음껏 불러보고 싶고, 팔이 없어도 그 사람과 손을 잡고 싶고, 심장이 없어도 그 사람만 생각하면 온 몸이 고동치고, 나의 뇌가 없어도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는, 사랑에 빠진 그 격렬한 감정을 이 시를 통해 공감하게 된다.


"말테의 수기" 중 마음에 와 닿는 표현들이 여러 가지 있었지만 그중에 딱 하나만 끄집어내어 말하고자 한다.


예컨대 나는 많은 얼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식해 본 적이 없다. 사람들도 많지만, 얼굴들은 더 많다. 누구나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얼굴을 몇 년씩이나 쓰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그 얼굴은 써서 닳고, 더러워지고, 주름이 잡히고, 여행 중에 끼고 다닌 장갑처럼 늘어나기도 한다. 그들은 검소하고 단순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얼굴을 바꿀 줄도 모르고, 씻을 줄도 모른다. 그들은 자기들이 지닌 얼굴이 충분히 좋다고 생각한다. 누가 그들에게 그렇지 않다고 반증해 보일 수 있을까? 이제 생기는 당연한 의문은 그들도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니, 다른 얼굴은 무엇에다 쓸까 하는 것이다. 다른 얼굴들은 잘 보관해 둔다. 자식들이 그것들을 쓰게 될 테니까. 그렇지만 그 사람들의 개들이 그것을 쓰고 나가는 일도 생긴다. 그러지 말란 법이 있는가? 얼굴은 얼굴일 뿐인데. 또 어떤 사람들은 무척 빠르게 얼굴을 차례차례 바꿔 쓰면서, 그것들이 다 닳아 없어지게 한다. 처음엔 그 얼굴들을 영원히 지닐 거라 생각하지만, 마흔 살도 되기 전에 벌써 마지막 얼굴이다. 거기에도 물론 나름의 비극이 있다. 그들은 얼굴을 아끼는 데에 익숙하지 않다. 그 들의 마지막 얼굴은 일주일 만에 다 닳아 구멍이 생기고, 여러 군데가 종잇장처럼 얇아진다. 그래서 점점 얼굴도 아닌 바탕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들은 그것을 쓰고 돌아다니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릴케는 사람들을 관찰할 때 그 사람이 대중 앞에서 드러내는 얼굴과 그 얼굴 뒤에 숨어 있는 바탕이 있다는 이분법적 시각을 보여 준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남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여러 개의 얼굴을 각자 가지고 있지만, 그 사람의 생각, 가치관에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한 얼굴만 고집한다. 릴케는 그러한 사람을 검소하고 단순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은 여러 가지 얼굴을 바꿔 쓰는데 익숙한 사람들은 나중엔 다 닳아버려 바탕이 드러나게 되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릴케가 말한 '바탕'이라는 것은 남들에게 드러내면 그 사람에게 이롭지 못한 점 혹은 자신에게 불이익을 가져다주는 모습들이란 것이다.  


릴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적절하게 얼굴을 바꿔 쓰면서, 그 얼굴들을 소중하게 여겨 닳아지지 않도록 하는 것인 것 같다. 하지만 그가 말한 얼굴은 자신을 의도적으로 혹은 거짓으로 포장하는 얼굴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아마 각 사람 속에 있는 생각들, 언어 습관, 행동 습관, 사람에 대한 태도가 아닐까? 얼굴이란 것이 결국은 상대방이 있어야 드러나는 모습이니 말이다. 거울 속에 비친 나 자신의 모습은 고정되어 있고, 자신의 얼굴의 바탕이든 아니든 나 이외의 사람들을 신경 쓸 필요가 없기 때문에, 결국 그 얼굴이라는 것은 우리가 타자하고의 관계를 맺을 때 드러나는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이 얼굴은 상대방에 따라 자신의 한 단면을 보여주기에 얼굴이라고 지칭하는 것일 게다. 연인 관계에서는 연인으로서의 모습이, 직장에서는 직업인으로의 모습이, 가족 관계에서는 가족으로의 모습이, 친구관계에서는 친구로의 모습이 말이다. 이 모두가 자신의 얼굴들인 셈이다. 그래서 부부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드러내는 전체의 모습은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상황과 사람에 따라 바뀌기 때문에 어떤 모습만 그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 없기에. 하지만 만약 각각의 관계에서 적절한 얼굴이 필요한데 오로지 한 얼굴만 고집한다면 분명 관계에 문제가 생길 것이다. 직장에서 가족 관계의 얼굴을 가지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면 관계가 불편해 지는 것은 자명한 일일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종종 경험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릴케가 말하고자 하는 인간의 얼굴이란 어떤 고정된 것이 아닌 상대방과 상황에 따라 그 얼굴을 변화해야만 하는 얼굴이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자면 상대방과의 관계를 더욱 발전시키고, 성장시키기 위해서 내가 고집하는 얼굴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상대방도 변화하는 얼굴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 변화하는 얼굴이 너무 빨리 변화해서는 안된다는 것. 그것은 관계 안에서의 신뢰성을 해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제 만났던 사람이 오늘 너무 다른 모습을 보인다면 신뢰가 안 가기 때문일 것이다. 천천히 자신의 얼굴이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지지 않으면서 건강한 얼굴로 성장하고 발전하는 얼굴, 그 얼굴을 릴케가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나의 생각과 바람일 수 도 있다. 그것은 자신이 상대방이 바라바 주기를 바라는 나의 모습과 괴리된, 포장된 얼굴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에서 서로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마음, 사랑의 마음에서 기인한 얼굴이 된다면, 그것은 곧 나에게 힘을 주고, 서로에게 힘을 주는 얼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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