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더라도 동포끼리는 악을 악으로 대하지 말고 사랑하자.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해왔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이광수, “도산 안창호”, P 92.
일제 치하의 감옥에서 일본 검사의 심문 중에 이렇게 당당히 말했던 도산 안창호 선생, 그가 추구했던 한인 이민 사회는 어떤 모습인지를 살펴보고, 현재 캐나다 한인 이민 사회를 생각해 본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1879년 11월 11일에 대동강의 도롱섬에서 태어났다. 그가 17세 되던 해인, 1894년 갑오년에 청일 전쟁이 일어났다. 수없이 많은 조선인들이 살상당하고, 가옥과 고적들이 파괴되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분개하였고 한탄하였다. 그는 왜 이런 전쟁이 일어나는지 그 이유를 자세히 고민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타국이 마음대로 우리 강토에 들어와서 설레는 것은 우리나라에 힘이 없는 까닭이다.”
한 청년의 마음속에 불길을 넣은 것은 동포의 아픔이었고, 나라가 힘이 없어 자국의 백성들을 돌보지 못한 분노였으며, 다시금 제 민족 제 나라가 외세에 굴복당하지 않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불굴의 의지였으며, 그 깊은 곳에 한인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그는 ‘힘’에 대해서,
“국민이 도덕 있는 국민이 되고, 지식 있는 국민이 되고, 단합하는 국민이 되어서,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남에게 멸시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국민이 되는 길은 국민 중에 덕(德)있고 지(知)있고 애국심 있는 개인이 많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길은 무엇이냐? 우선 나 자신이 그러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내가 덕(德)있고 지(知)있고 애국심 있는 - 즉 힘 있는 사람이 되면 우리나라는 그만한 힘을 더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그는 스스로 그러한 사람이 되기를 결심하며, 만민공동회가 보부상 파의 습격을 받아 흩어지게 되자, 미국 유학 길에 오르게 된다.
22세의 청년으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그는 어느 날 길가에서 한인들이 싸우는 광경을 미국인들이 웃으며 구경하는 것을 보고, 싸움을 말리며 왜 싸우는지 묻게 되었다. 이유인즉슨 그들은 인삼 행상이었는데 서로 협정한 판매 지역을 범하였다하여 싸우는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샌프란시스코의 한인 동포들을 두루 찾아 그 생활 상태를 조사한 후에, “당당한 독립 자격이 없다. 이들이 이러하므로 미국인들이 우리 민족 보기를 미개인이라 하고 독립 국민의 자격이 없다고 보는 것이라.” 하며 한탄하였다.
여러 날 고민한 끝에 안창호 선생은 공부의 목적을 버리고, 미주 동포가 문명한 국민다운 생활을 하도록, 그리하여 미국인들이 독립국가를 경영할 만한 소질과 능력이 있는 국민이라는 것을 보도록 노력하리라 결심하였다.
안창호 선생은 스스로 소제 인부가 되어서, 동포들의 집을 방문하여 그들의 거처를 깨끗게 하였다. 이는 어느 집이나 그 당시 동포의 집은 문 앞이 지저분하고, 실내가 불결하고, 불쾌한 냄새가 나서 이웃 서양인들이 불쾌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웃 사람들이 싫어한 것은 고성 담화와 시끄럽게 떠드는 것이었다.
안창호 선생은 스스로 청결 운동을 시작하였고, 동포의 생활이 변하게 되자 정신생활까지 변화를 일으켰다.
그를 본받아 동포들은 의관을 정결케 하고, 담화도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며, 이웃 사람들이 싫어하는 냄새나 음성이나 행동을 보이지 아니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자신이 왜 이런 운동을 하는지 동포들에게 설명하였는데, 각 한인이 미국인에게 불쾌한 생각을 주면, 전 미국인으로 하여금 우리 민족 전체를 불쾌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안창호 선생의 자발적인 노력은 점차적으로 동포들의 신뢰를 받았고, 동포들이 어려우면 그에게 의논하러 오고, 식사도 대접하였다.
동포들의 신뢰를 얻은 안창호 선생은 동포들에게 인삼 행상 구역을 공평하게 정하고, 가격을 정하여 서로 경쟁하여 값을 떨어뜨리게 하는 폐단이 없게 하였고, 협동과 준법의 훈련을 하여서, 인삼 행상들이 단합하여 매입과 매출을 하나의 큰 조직에서 함으로써 신용과 이익의 안전을 보장하려 하였다. 그리고 한인의 노동력을 통합 공급하는 기관을 만들고, 미국인의 노동력 주문을 받고 한인의 노동력 공급을 함으로써 노동자들의 최저 임금을 보장하고 또 실직이 없게 하였다.
안창호 선생은 공립협회를 세우고, <공립신보>을 발간하였다. 이는 다시 확대하여 미주국민회가 되고, <대한민국신한민보>을 발간하였다. 미주 국민회는 캘리포니아주 여러 도시의 흩어져 있는 한인들을 조직하여, 나아가서 하와이, 멕시코에 있는 동포까지 합하여 대한인국민회를 형성하였다.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 수립과 그 이후의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한 대한인국민회가 이렇게 한 사람의 노력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안창호 선생이 시작한 민족 수양 운동으로 인해, 한 미국인이 안창호 선생의 민족 운동에 감격하여, 한국인을 위한 회관을 무료로 사용케 한 일화는 유명하다.
조선인에 대한 사랑과 나라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한 도산 안창호 선생의 민족 수양 운동은 대한인국민회를 낳았고, 이 국민회는 “민족 수양 운동이요, 독립을 위한 혁명 운동이요, 민주주의 정치를 실습하는 정치 운동이었다. 뿐만 아니라 재미 동포의 보호 기관이요, 취직 알선 기관이요, 노동 조합이요, 권업 기관이요, 문화 향상 기관이었다." 또한 국민회는 나라 잃은 조선인을 위한 대사관의 역할도 하였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한국인들에게 미주 동포들에게 강조한 것은, 각자가 높은 도덕성을 가진 신용 있는 한국인이 되는 것이었다. 어딜 가던지 한국인이 말하는 것은 바로 신용보증 수표가 되고, 자신뿐 아니라 동포들을 사랑해서, 실제적으로 서로의 어려움을 돌봐주고, 나아가서 세계인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광복 72주년이 되었지만, 도산 안창호 선생이 꿈꿔왔던 나라로 독립이 되었는가? 라고 묻는다면, 아직 그 독립은 완성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동포들이 사는 한인 사회는 한국에서 외국으로 유학을 갈 때면 ‘한국 사람을 가장 조심하라’는 말처럼 신용 잃어버린 사회가 되었다. 한인 사업가들은 외국인보다 한인들을 더욱 착취하고, 신분을 이용해서 노예처럼 부리는 일들은 너무 흔한 스토리가 되어 버렸다. 한인 단체장들의 분쟁과 횡령은 늘 뉴스에 나오고, 자신들의 명예를 위한 도구로써 한인단체가 존재할 뿐이었다. 안창호 선생이 꿈꿔왔던 한인 이민 사회가 되려면 우리는 다시금 캐나다 이민 사회를 돌아보자. 각 한인들이, 나부터 스스로를 수양해서 신용 있는 사람, 정직한 사람이 되고, 주변의 어려운 한인들을 돕고, 서로 사랑한다면 캐나다의 다른 민족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게 될 것이며, 캐나다 사회에서 책임과 역할을 다하는 진정한 일원으로 인정받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를 위해 우리 모두가 노력했으면 좋겠다.
<2017년 애국지사회에서 주최한 광복 72주년 기념 문예작품 공모 수필 입상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