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노트] '노인과 바다' 그리고 헤밍웨이의 삶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인 어네스트 헤밍웨이. 그와 그의 작품 '노인과 바다'를 통해 성숙한 인간상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도록 만들어준 '노인과 바다'(1952)는 그의 삶을 드러내고 있다. '노인과 바다'의 소설 속에 들어가기 앞서 그의 삶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버지 크로렌스 에드먼드는 마초적인 상남자였고, 어머니 그레이스 홀은 예술적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두 살 때 아버지는 그에게 엽총을 선물하였다. 어머니는 5살 때까지 헤밍웨이에게 여자 옷을 입혔는데, 이를 굉장히 부끄럽게 느낀 헤밍웨이는 남성적인 것을 더욱 추구하였다. 그래서 어머니와 애착관계가 잘 형성되지 않았기에 헤밍웨이는 어머니에 대해 분노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심지어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자신의 남성성을 부인하고 여성으로서 성을 강요했기에 그는 사냥과 스포츠에 집착하게 되었고, 자신의 남성성을 드러내는 몸에 강한 애정을 드러내었다. 이는 나중에 그의 여성관에도 나타난다. 4번의 결혼과 3번의 이혼, 그리고 여성들과의 염문 속에서 그가 생각했던 사랑은 "가슴 뛰는 사랑, 자신을 수용하는 사랑"이었다. 결혼 생활을 하고 있더라도 한 여성이 자신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면 이혼하고 그 여성과 결혼을 하였던 것이다. 동양적 사고에서는 잘 이해되지 않지만 그가 정의한 사랑에 충실하게 살았다고 생각 할 수 있다. 그것이 옳고 그름에 대한 평가는 그 자신만이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자신의 부인들에게 충실하지 못했지만, 자식들에게는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다 하였다고 한다.
고등학교 입학 후부터 헤밍웨이는 축구, 권투, 수영, 사격, 육상 등 만능 스포츠 맨으로 적극적 활동을 펼쳤다. 이때 헤밍웨이는 셰익스피어, 스티븐스, 키플링, 디킨스, 포우 등을 탐독하면서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예술적 재능을 글쓰기로 발전시켜 나간다. 학교의 주간지 <<트리퍼지>>의 편집부에서 활동하며, 자신의 습작들을 학교의 계간지 <<타불라>>로 펴내게 된다. 이때부터 그의 주된 관심사는 전쟁과 폭력, 그 사이의 허무함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자 하였으나 고등학교 때 다친 눈으로 신체검사에서 탈락하고, <<캔자스시티 스타>> 신문사에 기자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으로 그의 문체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후 1918년 신문사를 그만두고 적십자 야전 위생대의 장교로서 이탈리아 밀라노 전선에 참여한다. 실전을 경험하고자 이탈리아 장교를 설득해서 PX의 관리인으로 최전방에서 참전하지만 포탄 파편을 맞아 중상을 입게 된다. 이때 야전병원에서 연상의 간호사를 사랑하지만 거절당하고 만다. 이때의 경험을 쓴 작품이 '무기여 잘 있거라'(1929)이다. 참혹한 전쟁의 참상 속에서도 사랑은 꽃 피어나고, 죽음과 생명이 교차되는 지점에 사랑이 있을 수 있음을, 그리고 그 사랑만이 허무한 죽음을 다시 생명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음을 드러낸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온 헤밍웨이는 신문사의 기고가로 활동하면서 1921년 해외 특파원이 되어 파리로 가게 된다. 거기서 자신을 포함한 로스트 제너레이션이라고 불리는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들과 교류를 하게 된다. 이들과의 교류는 헤밍웨이가 소설가로서 성장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는 계속해서 종군 기자로서 활동하며 1922년 '신의 몸짓', '최후로', 1926년 '해는 다시 떠오른다', 1929년 '무기여 잘 있거라'를 발표하며 작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후 스페인 내란에 참전하여 스페인 정부군의 원조에 적극적인 활동을 하며, 1940년 대작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발표한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전쟁을 시작하도록 만든 이념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그 속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누구를 위하는 것인지, 상부의 지시에 따라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들 속에서 일어나는 전우애, 전쟁의 폭력으로 고통받는 한 여자와의 사랑, 허무한 죽음, 그리고 교회의 장례식 때 쓰이는 종소리는 누구를 위한 애도인가를 스스로 질문하게 만드는 대작이다.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잘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이후 헤밍웨이는 종군기자 생활을 마치고 쿠바 아바나에서 살아가게 된다. 1940년 이후 이렇다 할 작품을 쓰지 못한 헤밍웨이에게 대중들과 평론가들은 헤밍웨이는 끝났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을 묘사하는 단어 '살라오(salao)'로 표현되고 있다. 즉, 노인과 바다에서 헤밍웨이는 노인을 자신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살라오'란 the worst form of unlucky, 모든 운이 사라져 버린 상태, 최악의 불운을 가리킨다. 하지만 노인은 몸은 늙고, 피부는 주름지고, 피부암의 반점들이 여기저기에 있을지라도 패배하지 않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노인과 바다'에서 패배(defeat)란 단어는 핵심 축이다. 이 패배하지 않은 눈을 가진 노인은 남들이 자신을 '살라오'라고 평가를 해도, 그 단어를 자신의 삶으로 가져오지 않는다. 비록 그가 가진 것이 낡고 오래된 집과 여기저기 밀가루 포대자루를 기워 넣은 돛을 가지고 있는 작은 어선이 전부였지만, 그의 눈빛처럼 그는 패배하지 않았다.
'노인과 바다'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한 노인이 5m가 넘는 청새치와 2박 3일 밤낮으로 사투를 벌이다 결국 뼈만 남긴 채 부두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여기서 성숙한 인간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첫 번째, 노인은 남들의 평가에 굴복하지 않았고, 자신의 한계와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가 84일 동안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을지라도, 남들이 험담과 눈빛과 행동으로 자신을 비웃을지라도, 그는 그들이 말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고기를 84일 동안 잡지 못한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몸은 예전과 같지 않고,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던 전문적인 지식과 직업 경험들은 젊은 청년들의 능력에 치이고,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위해 치열하게 살며 부양했던 가치들이 은퇴 후 더 이상 자신을 살아있게 만들지 못할 때 흔히들 허무함과 좌절을 느끼게 된다. 특히 자신을 쓸모없게 바라보는 눈빛들과 태도들, 그리고 돈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회적 평가들은 더욱더 좌절하게 만든다. 만약 나이가 70세가 넘었는데 남은 것이 낡은 집과 오래되고 보기에도 창피한 작은 어선이라면 더욱 그렇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노인은 84일 동안 고기를 잡지 못한 것은 인정하되, 그들의 평가를 거부한다. 그는 매일 그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했기에, 어부로서 최선을 다해 살아왔기에 묵묵히 자신의 한계와 모습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두 번째, 그가 가르친 소년에게 도움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고, 또 비굴하지도 않았다. 그 소년은 처음 40일 동안 고기가 잡히지 않자 그 소년의 부모님이 노인을 '살라오'라고 평가하며 다른 배에 태워 보냈다. 이후 노인은 혼자서 고기를 잡으로 나갔었다. 고기를 잡지 못하니 아무런 수입이 없는 그에게 소년은 자신의 돈으로 먹을 것과 맥주를, 그리고 고기잡이에 쓸 미끼를 사다 주었다. 도움받는 것이 아무런 일도 아닐 수도 있지만 도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자신이 가르친 소년에게서 84일 동안 고기를 못 잡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부끄러울 수 있는 일이 될 수 있고, 평생 어부로서 살아왔던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인은 그 사실을 인정하기에, 그리고 어부로서 고기는 못 잡았지만 성실하게 매일 고기를 잡으러 나간 자신을 믿었기에 그는 소년의 도움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자신의 당당함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노인처럼 자기 자신과 삶에 대한 확신을 가진 사람이 바로 성숙한 사람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도 당당하게 받을 수 있고, 또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것을 기뻐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소년에게 자신이 가진 지식과 기술들을 전수했고, 그 소년은 자신이 훌륭한 어부로 성장하는 마음을 노인에게 느꼈기 때문에 노인을 자신의 가족처럼 돌볼 수 있었던 것이다.
세 번째, 그는 큰 고기가 걸린 것을 알자마자 자신이 가진 능력과 지식을 오로지 그 고기에게로 집중하였다. 그는 큰 고기가 미끼를 물었을 때 그 고기가 수면 밑 어디쯤 위치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줄낚시할 때 미끼가 수면 밑 몇 야드로 내려가는지 정확히 알 정도로 그는 전문적인 식견을 보여주고, 큰 고기가 지치도록 낚시 줄을 풀고, 어깨와 손을 사용해서 낚시 줄의 장력을 느끼며 팽팽하게 유지해서 줄이 끊어지지 않게 하고, 큰 물고기가자신을 이틀동안 끌고가도록 내버려 두어서 수면위로 올라올 수 있게끔 지치도록 만들었다. 자신을 잘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큰 물고기가 걸렸다는 생각 때문에 흥분해서 큰 물고기의 상태를 알지 못한 채 끌어올리려다 줄이 끊어 졌을 것이다. 여기서 성숙한 사람의 모습을 본다. 그것은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다. 또한 자신의 왼손이 저리고, 낚시 줄로 인해 상처를 입었을 때, 적절하게 오른손으로 바꾸고, 바닷물로 치료를 하고, 다랑어와 돌고래의 고기를 체력을 위해서 적절하게 먹었다. 또한 정신적으로 약해질 때 이겨내기 위해서 자신의 젊어서 이겼던 팔씨름을 회상하면서 자신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이를 통해 2박 3일간 젊은이도 힘든 물고기와의 싸움에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그는 그의 패배하지 않는 눈처럼 자신의 모든 역량을 한 곳으로 쏟아부은 것이다. 성숙한 인간이란 자신을 잘 알기 때문에 역량을 쏟아부을 때에 온전히 집중해서 모든 역량을 쏟아부을 수 있는 사람이며, 과정에 충실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 결과가 결국 상어로 인해 머리와 뼈 밖에 안 남아 있을지라도 그는 그것에 대해 패배하였다고 말하지 않았다.
네 번째, 그는 죽는 그날까지 주어진 하루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사람이었다. 노인은 홀로 잡은 머리와 뼈만 남은 큰 물고기를 끌고 항구에 도착했다. 평소 하던 대로 돛을 빼어내어 집으로 가는 길에 5번이나 쓰러지고 일어나서 겨우 집에 들어가 지쳐 쓰러졌다. 그리고 소년이 그가 걱정돼서 따뜻한 커피와 음식들을 가지고 왔을 때 그는 내일 다시 고기 잡으러 갈 준비를 한다. 오로지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매 순간 삶에 대해 진지한 태도를 가지고 임했기에 그럴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실패가 아니라 일상의 마침인 것이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를 쓰면서 82번 교정하였다고 한다. 영문으로 보면 군더더기 하나 없는 깔끔하고 간결한 문체를 볼 수 있다.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노인처럼 자신을 '살라오'라고 평가하는 세상을 향해 '나는 패배하지 않았고, 패배할 수 없어'라고 응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나진 않았어. 인간은 파괴되어 죽을 수는 있지만, 패배할 수는 없어." - 헤밍웨이
하지만 이렇게 멋진 성숙한 인간을 그렸던 헤밍웨이는 자신의 삶에서는 그렇게 살지 못했다. '노인과 바다'로 노벨 문학상을 타고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지만, 1954년 비행기 사고로 당한 큰 부상은 헤밍웨이를 파괴시킨다. 글에 대해서 완벽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헤밍웨이는 자신의 육체적 능력이 크게 손상을 당하자 마음까지 큰 상처를 받게 된다. 그래서 나중에는 "글이 써지지가 않아"라며 좌절하며, 엽총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가 죽기 며칠 전 그는 그녀의 첫 번째 부인 해들리 리처드슨에게 전화한다. 그녀와의 이혼 후 네 번째 결혼을 하고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에게서 첫 번째 부인 해들리는 각별했다. 그녀와 이혼하게 된 것은 헤밍웨이가 파리에 있을 때 스위스로 출장을 가게 되자, 해들리는 그에게 깜짝 선물을 해 주려고 파리에서 헤밍웨이가 적은 습작들 모두를 가방에 넣어서 스위스로 가게 된다. 이때 기차역에서 헤밍웨이의 습작들을 잃어버리게 되는데, 이때 헤밍웨이는 굉장히 실망감을 느끼고, 이혼하는데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해들리가 헤밍웨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이 사건이 드러내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관심 있고 좋아하는 것을 알고, 그를 위해서 몇천 킬로미터의 여행길에 그것을 들고 찾아간다는 것은 그 사람을 진정 사랑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헤밍웨이가 해들리를 통해서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느끼지 못한 사랑을 느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본성인 남성을 부정했던 어머니와 다르게 자신의 일과 좋아하는 것을 잘 알고 받아들였고, 그것을 더욱 성장시키고자 노력했던 해들리는 아마 헤밍웨이가 3번의 이혼과 네 번의 결혼을 뒤돌아 봤을 때 그녀의 사랑이 자신의 마음에 깊게 새겨져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죽기 전 해들리에게 전화해서 안부를 물어본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라 본다. 어쩌면 그가 그녀에게 전화한 이유가 함께 있어달라고 말하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하지만 자신이 그녀에게 이혼이라는 아픔을 주었기에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하고 안부만 전한채 전화를 끊어버린 것은 아닐까 상상해 본다.
헤밍웨이가 자신의 책 '노인과 바다'의 노인이었더라면 그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에게서 글쓰기란 노인의 고기잡이와 같았을 것이다. 노인이 만약 어부 일을 못하게 되었을 때 노인은 어떻게 했을까? 책 속의 노인을 봤을 때 노인은 어부 일을 못했을지라도 패배하지 않는 눈처럼 하루하루 주어진 삶을 살았다고 본다. 하지만 헤밍웨이에게 몸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드러내는 증표이자 글쓰기의 근간이었다. 그는 글을 쓰지 못하는 것 때문에 스스로를 패배하였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그가 몸이 성치 못해도, 글을 쓰지 못해도 그를 받아주고, 사랑해 줄 누군가가 필요했지만, 곁에 그런 사람이 없다고 느꼈기에 그 자신이 파괴되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본다. 진실은 그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책을 덮으며 '노인과 바다' 속의 노인처럼 성숙한 인간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읽은 책: '노인과 바다', 어네스트 헤밍웨이, 정홍택 옮김, 소담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