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시시한 마무리
두 번째 문의 메일을 보내고 내심 답변을 기다렸다.
혹시 이런 회사는 나같은 이상한 고객이 걸어온 장난을 장난으로 받아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 같은 무언가가 있었다. 그게 옛날에 내가 가졌던 이 회사에 대한 환상 같은 거였으니까.
재밌고 자유롭고 센스있고 뭐 그런.
혹시 일이 많아서 답변을 못 주는 건 아닐까.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버그라서 막 손도 못대고 답장을 못 주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빈둥빈둥 간간이 받은 메일함을 새로고침 하던 중에 답변이 왔다.
안녕하세요, 111%입니다.
계정 연동 및 게임 로그인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아 불편 끼쳐드려 유저님께 고개 숙여 깊이 사과 말씀드립니다.
해당 오류는 6.0.4 버전으로 수정이 완료되었으며, 스토어를 통해 업데이트 진행 시 정상적으로 게임 이용이 가능합니다.
불편 겪으신 유저님께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실 수 있도록, 금일중 우편을 통해 보상 지급 예정입니다.
한분한분 빠짐없이 보상 드릴 수 있도록 자료 수집 중에 있어 보상 지급까지 시간이 소요될 수 있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번 게임 이용에 불편드린 점 깊이 사과 말씀드리며, 이번 사태를 계기로 동일 문제 발생하지 않도록 더욱 노력하는 랜덤다이스가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 숨이 탁 놓였다.
내가 기대한 건 이렇게 고개 숙인 사과 말씀이 아니었는데.
이렇게 정갈하고 깔끔한 사과문을 바랐던 건 아닌데.
### Do not reply below this line ### 밑으로 쓰여진 복사 붙여넣기 사과문은 내가 이 회사에 지원했었다던 사실과 차인 사실, 이 게임을 얼마나 좋아하고 애정하는지에 대해 열변을 털어놓은 문의 메일을 아주 정중하고 정제된 태도로 한 번 더 차인 느낌을 줬다.
그때는 그냥 씹었지만 이번엔 내가 잘못했으니까 답변 정도는 보내줄게, 싶은.
문의했던 메일 숫자만큼 저 내용에서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메일들이 같은 시간에 와있었다는 건 정말 마음 아리게 했다. 최소한 내 문의를 읽고 보낸 메일이라면 이렇게 시간 차이가 없지 않았을텐데. 그냥 복사된 사과문을 일괄적으로 보냈구나. 남들도 다 똑같이 받았겠지 아마.
아마.
그렇게 게임은 업데이트가 되었고 버그는 고쳐졌다. 그리고 여전히 무미건조하게 GM발송 이라는 문구가 찍힌 인게임 유료재화 보상이 우편함으로 들어왔다.
아니, 이러면 정말로 전여친한테 연락하고 차인 것 같잖아?
정말로 옛 기억과 환상 가지고 버그 핑계로 연락 한 번 구구절절하게 해봤다가 아무 감정 없어서 생각보다 사무적이고 차가운 태도로 한 번 더 차인 거 같은 기분이잖아. 많은 거 안 바랐어! 그냥 ㅠㅠ 하고 우는 이모티콘이라도 써줄 수 있었잖아! ㅠㅠㅠ내가 대신 운다 야!! ㅠㅠㅠ
근데 또 생각해보면 이런 메일에 일일이 답장을 써줄 시간도, 그렇게 해서 얻는 이득도 뭣도 없잖아 사실. 이 회사가 특별했던 건 나지 내가 이 회사에 특별했던 건 아니니까. 이랬다고 나만 특별대우 받으면 그게 더 큰 문제 아닌가?
나는 말도 안 되는 뭔가의 환상을 가지고 무엇을,
에이씨.
나는 매우 허탈하고 허망한 마음과 그걸 이해하는 슬픈 머리로 게임 몇 판 플레이 해보다가 살까 말까 고민하던 3,900원짜리 프리미엄 상품 하나를 결제해했다. 버그 때문에 마음 고생했을 텐데 이거라도 좀 받고 기운내어라, 하는 차인 남자의 마지막 찌질함 살짝 담긴 느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