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자꾸 알아서 켜지는 건데
나에겐 최근에 산 M1 맥북 에어가 있다.
간단한 문장이지만 내가 이 문장을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오래된 고민과 역경이 있었는지 모른다. 왜 맥북인지, 왜 M1인지 왜 에어인지 왜 최근에 샀는지 등등 하나하나의 이유에 한 달이 넘는 고민들이 들어있다. 대충 아 노트북 하나 사야겠다, 하고 생각한 지 1년 정도 넘은 다음에 샀다. 이 웃기지도 않은 기간 동안 새로운 노트북이나 태블릿도 출시되었다는 걸 생각하면 나의 결정장애가 얼마나 중증인지 새삼스럽게 느껴지게 된다.
아무튼 맥북 에어가 있다. 여기 물을 쏟았다.
간단한 문장이지만 이 역시 이야기가 길다. 나는 카페를 준비 중이다. 다양한 차와 커피를 마셔가며 노트북으로 이런저런 일을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여기는 엄청난 시골이라 벌레가 많고 특히 음식이라도 조금 하면 파리가 꼬인다. 그날도 짜증 나게 대드는 파리를 서너 마리쯤 잡았다. 이제 잡는데 능숙해져서 기절만 시키고 밖에 풀어주는 스킬도 생겼다. 맨손으로도 잡고 파리채로도 잡고 한 번은 도마로도 잡아봤다.
파리를 잡는 데는 고도의 연기가 필요하다. 온몸으로 나는 아직 너를 발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필해야 한다. 그러고는 최대한 간결한 손목 스냅으로 파리의 이동 예상 방향의 역방향을 훑으며 살짝 사선으로 내려쳐야 한다. 이 글을 쓰면서도 방금 한 마리 잡았다.
나는 그날 오후, 멍청하게 종이컵 위에 알짱거리는 파리를 발견했고, 어딘가에서 다른 일을 하다 온 나는 마침 잘 되었다 이 파리 새끼, 저 컵에는 오전에 내가 차를 마시고 지금은 비었지. 컵과 함께 사라져라.라고 생각하며 파리를 후려쳤다. 그런데 업보는 업보인가 보다. 살생은 살생이지 맞아. 나는 그날 오전에 파리들을 잡은 마음에 기쁜 나머지 오늘은 운이 좋으니 차를 한 번 더 우려먹겠다며 정복자가 축배를 드는 마음으로 컵에 물을 부어놓았던 것이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컵은 날아가지 않고 철퍽하고 쓰러졌고 맥북 위에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파리는 도망도 안 가고 그 물 위를 몇 번 빙글빙글 돌다 날아갔다. 파리에 지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고 싶지 않지만 순간 이 새끼 의도한 건가 싶었다. 사고가 잠깐 정지해있던 나는 일단 바로 선을 다 뽑아버렸다.
전자기기가 침수되면 일단 전원을 꺼야 한다는 상식은 박혀있었다. 연결된 모든 선을 다 뽑는 동시에 다른 손으로 휴지를 뜯어 키보드 위로 던지면서 선을 뽑던 손으로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그리고 대환장 파티가 시작되었다. 키보드를 닦으면 키가 눌려서 맥이 켜지고 나시 버튼을 눌러 끄고, 누르면 지문을 인식해서 다시 켜지려고 하고 닦으면 또 켜지고, 이게 뭔.
일단 어떻게든 닦아낸 뒤 휴지를 도톰하게 깔고 맥북을 뒤집었다. 순간 고민했다. 뒤집어서 물을 뺀다는 발상은 좋은데 이게 디스플레이에 들어가서 여기가 침수되면 어떡하지? 하다가 역시 메인보드보다는 디스플레이가 싸게 먹힐 것 같아서 그대로 뒤집어두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검색해본 것은 맥북 방수였다.
방수 같은 건 안 된다. 그리고 나와 같은 사람들의 엄청난 한탄 글과 수많은 대처법, 공포심 유발 게시물 같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물이 잘 나오는지, 스며든 건 없는지 맥북을 살짝 열어 확인하려고 했다. 그런데 살짝 열자마자 뙇~ 하는 웅장한 소리와 함께 애플 로고가 번쩍 하고 나오는 게 아닌가.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