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이

내 귀여운 고양이

by 이승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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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스의 grinned 작가님을 알게 된 건 어쩌면 고양이를 너무나도 사랑하던 나에게는 필연적인 수순이었다. 컵을 하나 살 일이 있다가 뭐 하나라도 특별한 걸 사고 싶었던 나는 고양이를 검색했고, 너무나도 귀여운 고양이 도자기 작품을 만드는 작가님을 알게 되었다. 나는 홀린 듯 주문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커스텀 제작도 해주신다는 말에 나는 랑이 사진을 몇 장 보내드렸고 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게 벌써 몇 해 전의 이야기이다.


랑이는 죽었다. 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기 위해 나는 정말 오랜 시간을 돌아왔다. 정말 너무나도 안 좋은 우연이 겹치고 겹쳐 신장이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고양이는 정말 불현듯 내 품 안에서 죽었다. 열이 너무 올라 사료도 삼키지 못하고 그저 눈만 끔뻑 끔뻑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품 안에서 숨을 다했다. 그런 랑이를 보내주는 건, 랑이에게 어떻게든 밥을 먹이기 위해 잠을 몰아낸 에너지 드링크가 책상에 수북이 쌓이고, 온몸이 사료와 약으로 범벅되어 오열과 지쳐 쓰러져 정신을 깜빡깜빡 잃어가던 나에겐 너무나도 버거운 일이었다.


이후로 나는 까만 고양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지나가던 누군가가 나에게 뭘 사줄 때는 고민할 일이 없다고 했다. 그냥 까만 고양이의 무언가를 사주면 좋아한다고. 나는 납득했다. 당연하게도 까만 고양이만 보면 나는 랑이 이름을 한 번쯤 입에 담았고, 보고 있자면 랑이가 떠올라 어쩔 줄 몰랐으니까.


그래서 랑이의 제작을 부탁드리려다 문득 숨을 멈추었다.


열이 많이 올랐던 고양이는 이상행동을 했다. 물이라면 몸서리치며 싫어하던 고양이가 더운지 자꾸 물에 들어가려고 바둥거리는 일들을 했다. 특히 변기에 자꾸 들어가려고 해서 화장실 바닥에서 변기를 향해 앞다리를 내미는 고양이를 끌어안고 목놓아 울었던 적이 몇 번인가 있었다. 머그잔에 매달린 고양이는 너무나도 귀엽지만, 그 모습이 그때 변기에 매달려 물에 들어가려는 랑이를 닮아있었다. 나는 주문 버튼을 누르려다 말고 울어버렸다. 그게 벌써 몇 해 전의 이야기이다.


그래도 나는 작가님의 작품이 너무 좋았다. 꼭 어딘가에 좋은 선물을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작가님의 작품을 골랐다. 보자기에 곱게 포장된 작가님의 병과 잔은 최고의 선물이었다. 전 직장 동료의 결혼에도, 정말 친한 친구의 결혼에도, 갑자기 가게 된 집들이에도, 나는 크게 생각하지 않고 늘 최고의 선물을 보냈다.


그러다 문득 제작을 부탁드리려던 랑이가 생각났다.


오랜만에 작가님의 작품을 또 선물로 보내 놓고 다시 또 나는 몇 해 전의 나와 같이 주문하기 버튼을 내려다보며 오만가지 생각에 휩싸였다. 그래, 그냥 단념하자. 나는 랑이가 이렇게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면 또 무너지고 또 울어버릴지도 몰라. 그렇게 단념하던 때에 작가님에게 메시지가 왔다.


나는 의미부여를 좋아한다. 무언가 큰일이 있을 때, 큰 결정을 해야 할 때, 뭔가 계시나 계기라든가 뭔가 나의 결정에 도움을 주는 신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에겐 작가님의 메시지가 그러했다. 메시지의 내용도 전혀 상관없는, 작가님의 감사인사 담긴 메시지였지만 나에겐 적어도 용기였다. 갑자기 행복해졌다. 마음이 밝아졌다. 랑이의 저 마지막 모습마저 내가 간직할 수 있다면 나는 더 이상 이 기억으로 괴롭진 않겠구나.


제작을 주문하고 예전에 랑이를 보내며 쓴 글을 읽었다.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 랑이의 마지막을 기록해야겠다 싶어 남은 힘을 부여잡고 쏟아낸 단어 뭉치들이었다. 다시 한번 읽으면서 이번엔 울지 않겠다 생각했다. 그렇게 기다리다 작가님의 작품이 도착했다.


아주 큼직한 게 늠름해진 랑이가 귀엽게 매달려 있다. 아무래도 이 정도면 대장 고양이도 충분하겠다 싶었다. 아주 오랜만에 먼 길을 돌아서 나에게 왔다. 이제 이런 모습을 봐도 괴롭지가 않다. 이것마저 그립고 보고 싶은 기억이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마음이 빛난다. 행복하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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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시간을 돌아 나는 결국 너를 제대로 그리워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아파보이고 애써 외면하려 했던 그 기억도 이제 울지 않고 떠올릴 수 있다.


나는 잘 지내니, 너도 잘 지냈으면 좋겠다.

이렇게나마 오랜만에 닿을리 없는 인사를 슬며시 보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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