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꼭 그런 날 영화처럼 내리더라
그럼 우리 플랫폼 이름은 뭐라고 할까?
플랫폼 설계를 시작해야 하는데 우선 이름부터 뭔가 정해져야 BI도 만들고 발표 자료도 만들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셋이서 이야기를 하다가 누군가가 '영어 단어 뒤에 y를 붙이면 의인화가 되어서 귀엽다던데.'라는 말을 툭 던졌다. '아 그러면 이게 광고 플랫폼이니까 ADy 어때?' '아 그러면 당신을 위한 광고라는 뜻으로 AD for you의 약자라고 의미 부여하자.'라고 해서 플랫폼 이름이 급 Ady, 애디로 결정되었다. 우리는 이걸 가지고 플랫폼 설계를 시작했다.
User Flow는 플랫폼을 처음 켜서 사용자가 플랫폼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경로로 만들어 사용에 지장이 없는지, 불필요한 단계가 너무 많지는 않은지, 기능에 접근할 수 있는 루트가 없진 않은지, 연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지 등을 체크해볼 수 있고 빠진 부분이 없는지 확인해볼 수 있다. IA (Information Architecture: 정보 아키텍처)와 더불어 UI 기획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이다. 우리는 각 화면을 인쇄해서 바닥에 깔아놓고 차근차근 발로 따라가 보며 차근차근 디자인을 시작했다.
디자인은 디자인 나름대로 진행하고 공모전 및 대외용 기획서도 착실히 준비했다. 나는 기획과 디자인을 동시에 전공했었고, 디자이너였던 Y와 기획자였던 S 사이를 오가면서 때로는 밤도 새워가며 준비했다. 잘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했는지 고생하고 준비하는 과정이 힘들다기보다 재밌었던 것 같다.
그 결과 우리는 경기도 한 창업 지원 사업에 선정되었다. 천만 원 상당의 지원금을 준다고 하던 사업이었다. 우리는 드디어 개발 비용을 좀 보탤 수 있게 되었다며 좋아했다. 뭔가 한 발 더 나아간 것 같았지만 실상은 조금 힘들었다. 최소 1주일에 세 번은 지원센터에 출근해서 8시간 근무를 해야 하는데 지역이 수원이었다. 얼기도 멀거니와 셋 중에 Y는 이미 T사의 인턴이었고 S와 나만 남았는데 당시 대표 격이었던 S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근데 형, 미안한데 나도 인턴 되어서.'라며 '형이 좀 출근해줘야겠어.'라고 말했다.
나는 당시 졸업 전 이어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이 사업을 위해서 수업 하나만 들으며 회의를 오고 가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같이 하자던 두 놈이 한꺼번에 인턴을 한다며 나가니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자기들은 퇴근하고 와서 회의하고 진행하면 된다 했지만 나는 무엇 때문에 시간을 희생하고 일도 없는 수원을 매일 출퇴근을 해야 하는지. 더구나 나는 취직 제의도 여럿 들어왔지만 시간이 없어 거절한 상태였다.
언젠가 사주를 보러 갔을 때
나는 십자가를 지고 살 팔자라고 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내가 희생하는 것도 좋았다. 그냥 그렇게라도 해서 돈이 벌린다면, 벌릴 수 있다면 좋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의 외로운 수원 출퇴근이 시작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큰 식당 같은 곳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사무실이 각자 있어서 굳이 출퇴근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냥 멍하고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데스크톱 대용으로 쓰던 커다란 내 노트북을 짊어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어깨가 빠질 것 같았지만 그래도 나름 즐거웠다. 지원금을 받기 전까진.
천만 원을 다 주는 게 아니란다. 무슨 멘토비, 강연한 강사비, 먹지도 않았는데 무슨 회식비, 밥값 등등 뭐가 다 빠지고 나면 700만 원이 조금 넘는단다. 음? 그게 대체 무슨 소린가 싶었는데 거기 한술 더 뜨기를 '먼저 집행하신 다음에 우리가 돈을 드릴 수 있어요. 물건 구매하시면 구매 비용만큼 저희가 드리는 거예요.'라고 했다. 아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신청하든가 했어야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대부분의 창업 지원 사업은 선집행 후지원이고 돈을 쓸 수 있는 부분도 세세하게 정해져 있었다. 제출해야 하는 서류도 영수증 하나마다 두텁게 써서 제출해야 했고 일부는 자부담금이 존재했다.
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받을 수 있는 돈을 깔끔하게 다 현금으로 받으려면 무슨 짓을 해야 하는지 규정집을 한참이나 뚫어지게 보며 읽었다. 방법은 한 가지였다. 개발사에 개발을 아예 맡기고 프로토타입으로라도 샘플 플랫폼을 받는 것. 어차피 원천기술을 가지고 있는 A사도 있었고 개발 견적을 맞추는 일은 쉬워 보였다. 천만 원을 개발비용으로 치고 지원받을 수 있는 700여만 원을 제한 나머지 금액이 자부담금으로 급하게 필요했고 더 급한 건 선지급해야 하는 천만 원이었다. 이건 P 부장이 다행히도 도와주었다. 그렇게 제출 기한 마지막 날 서류 일체를 꾸려 서면으로 제출하러 당당하게 갔다.
그래서 구매하신 제품은요?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개발을 맡겼다니까요? 소프트웨어인데?' '여기 계신 대부분의 사장님들은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무언가를 사 와서 증빙하셨어요. 플랜씨도 그래야 해요.' 어안이 벙벙해졌다. 뭔 소리인가 이게.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었다. 이런 사례가 처음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증빙해줄 수 없다며 서류 일체를 거부했다. 프로토타입 시연 영상을 보여주었지만 막무가내였다. '손에 만져지는 걸 가져오라고요.' 절망에 빠졌다. '못 가져오면 어떻게 되나요?'
그러면 지원금은 못 드리겠죠?
마감까지 남은 시간은 2시간. 나는 PC방에 가서 그동안 만들던 UI/UX 기획서를 전부 출력하고 개발사에 전화 걸어서 프로토타입 어플 원본을 달라고 했다. 파일을 뜯어서 안에 있는 코드를 전부 복사하고 출력하니 다 합해서 서류가 100장 정도 되었다. 손에 다 들 수가 없어서 PC방에 있던 비닐봉지를 하나 빌려서 뛰쳐나왔다. 남은 시간은 30분 남짓, 하필이면 예보에 없던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나는 길거리로 나가 택시를 잡기 시작했다.
가는 길은 그날따라 이상하게 막혔고 마감 시간이 끝나기 5분 전에야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려 행여나 서류가 젖을까 봐 품에 봉지에 담긴 서류를 안고 빗속을 뛰었다. 7층에 있던 사무소를 엘리베이터도 없이 계단으로 달렸다. 겨우 도착한 다음에 나는 서류뭉치를 책상에 내던지다시피 하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은 기억이 난다. 그렇게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다.
멈추지 않고 우리는 근 시일 내에 열린다는 서울대학교 창업경진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결과는 장려상. 아이템은 참신하지만 너무 어렵고 영업이나 개발을 너무 외부에 많이 기댄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목되었다. 나는 스타트업이 그럼 외부에 기대지 내부적으로 무슨 역량이 있어서 그걸 다하겠냐고 반문했지만 무슨 창업 전설에 나올 것 같은 사람들 이야기를 하면서 왜 그렇게 못할 것 같냐고 되물었다. 그때 받은 상금은 30만 원이었다.
'됐어 시험 삼아해봤다고 하자.'
우리는 그렇게 합리화하기로 하고 다음 지원 사업과 경진대회를 찾던 중에 정말 절망에 빠질 정보를 발견했다. 웬만한 지원 사업이나 경진대회는 타 기관에서 수행한 것과 중복해서 지원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수중에 남은 현금이 백만 원 남짓한 가운데 대체 뭘 더 어떻게 해야 사업을 할 수 있는지가 갑자기 막막해졌다.
깨달은 사실은 스타트업에서 시험 삼아해볼 수 있는 일이라는 건 극히 드물다는 것. 한 번의 선택이 나락으로 던저져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문자 그대로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 비유 없이 문자 그대로. 개발은 개발대로 멈춰있었고 사업을 도모해보자던 어른들은 제 할 일 바쁘다며 각자의 본업으로 돌아간 지 오래였다.
망연자실해서 처져있던 우리는 남은 힘이 없었다. 언젠가의 특강에서 어떤 강사가 자신 있게 말하던 게 생각났다. 자기가 창업 경진대회 헌터였다면서 한 번은 자기가 키우던 대학생 한 명 몰아주려고 그 해 있던 대학생 창업 경진대회 상을 싹 쓸어갔다고. 그때 모은 돈을 자랑스럽게 말하면서 이듬해 법이 바뀌었다고 떠들었다. 아마도 자길 견제하려는 모양이라며 농담처럼 웃던 게 떠올랐다.
왜 그걸 기억 못 하고 우리는 이 푼돈이나 만들자고 그렇게 뛰어다녔는지 허탈해졌다. 다른 곳 참여 기회조차 박탈당한 그때, 개발을 더 이상 진행할 돈도 뭘 더 운영할 힘도 안 남아있던 그때, 나는 이 아이템을 바꿔보자고 제안했다.
그날 내 평생의 자랑거리가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