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 경진대회 대상
그리고 그보다 값진 것.

대상따위

by 이승준
어차피 광고를 보고 있다는 걸 인식시켜주는 거잖아?
우리 그걸 덜어버리자.


나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귀찮게 앱 개발이 필요하고 뭐하고 뭐 하는 거 다 걸어버리고 사람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는 걸로 시작하자. SNS에서 공유나 좋아요로 표현하게 하는 건 어때?' 이후로 비즈니스모델이 급격히 달라지게 되었다. 앱을 개발해야 했던 문제가 사라지자 돈 걱정도 사라졌고 뭘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아이디어가 샘솟았다.

광고를 봤다는 걸 알리면 기업이 그만큼 기부하게 만들면 어떨까?


당시 한창 남양유업의 사과 광고가 나오던 때였다. 먼저 맞은 채찍질이 고맙다고 말하는 광고였지만 여기에서 진정성을 못 느끼겠다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그러면 진짜로 우리가 대릴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게 발단이었다. '반성한다고 하니까 그 반성 어떻게 할지 우리가 도와주는 거지.' 광고를 보고 봤다는 사실을 알리고 전파한 수만큼 기업이 기부하게 만드는 플랫폼. 이게 Better의 초창기 모습이었다.


채찍질 광고 남양유업 15초 컷


그러다 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진정성에도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무상급식 배식하고, 연탄 나르고, 이런 것들이 물론 좋은 일이었지만 너무 보여주기식이고 식상하지 않나? 하는 것이 생각이었다. 차라리 거기 들일 돈이면 진짜 진심 담아서 사회에 좋은 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대지 7.png 선행이 마케팅의 수단이 되었을 때 진정성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 돈을 진짜 좋은 활동하는 사람한테 기부할 수 있게 하자. 사람들이 좋은 일의 기획을 SNS로 보고 공감이나 공유를 표현하면 그 수만큼 사회에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보고 기업의 CSR 예산을 기부하게 하자. 이렇게까지 생각이 닿으니 당장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PPT는 일사천리로 만들어졌고 사업 구상도 매우 빠르게 돌아갔다.


그렇게 한양대학교 글로벌 창업경진대회에 조심스럽게 기획서를 제출했다. '우리 이거 설마 안 받아주고 하진 않겠지?' 상 한 번 받은 것 때문에 여기저기 까이던 우리는 뭔가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슬쩍 넣었다. 결과는 1차 합격. 간만에 느껴보는 달콤함에 우리 셋은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본선에 올라가는 건 이 중에서 50% 정도라고 했다. 2팀이 한 멘토와 면담을 하고 멘토가 데려갈 한 팀을 선정하여 본선으로 가는 수순이었다.


86136111.jpg 우리는 꼭 오디션 프로그램 같다며 싫어했다.


본선 당일. 멀끔하게 차려입은 우리 셋은 무겁게 긴장한 마음으로 면담 장소에 나갔다. 거기에는 멘토라는 K 이사님과 얼핏 봐도 굉장히 어려 보이는 친구가 있었다. 면담이 시작되었고 그 어린 친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그때 굉장히 충격을 받았었는데 대학교 새내기였던 그 친구가 가져온 아이템은 스마트 냉장고였다. 어릴 때부터 발명을 좋아했고 그래서 이런 아이템을 구상 중이라며 챙겨온 서류를 늘어놓고 떠들기 시작했다. 나는 '아 이건 진짜 못 이기겠다.'라고 생각했다.

그 친구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일이 토할 것 같이 힘들었다. 그냥 빨리 돌아가서 이 아이템을 수정하고 더 철저히 준비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정신이 아득히 멀어질 무렵 우리 차례가 되었다. 간단한 자기소개가 끝나고 아이템을 소개할 때 내 머릿속에 들어있던 단어는 단 하나였다. 간절함.



31948148831_88e9838dff_b.jpg 그 친구는 천재였을 거다.


그렇게 면담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끼리 다음에는 더 잘하자며 서로를 위로했다. 그러고 돌아와 다시 기획서를 쓰면서 머리를 맞대고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면 며칠이 지난 뒤 결과가 나왔다. 합격이라고.


아주 나중에 K 이사님에게 우리가 뽑힌 이유를 들었던 적이 있었다. '원래 주최 측에서는 그 어린 친구를 뽑으라 했어. 그런데 너네 눈빛 보니까 안 뽑으면 죽일 기세더라. 그래서 다시 생각해보니 한 명이 하는 것보다 세 명이 더 가능성 있겠다 싶길래 주최 측에 말 안 하고 그냥 내가 판단했어.'


그렇게 본선에 진출해서 우리는 수익모델과 함께 자세한 기획을 시작했다. 그러나 곧 새로운 문제를 맞이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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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발표했던 PPT 자료들


문제는 어떻게 돈을 벌 거냐 하는 건데...


아무리 좋은 아이템이고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다 하더라도 돈을 벌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다. 기업의 제1목적은 누가 뭐래도 이윤의 추구이다. 당시 카피라이터였던 나와 디자이너였던 Y와 달리 경영학과 출신이었던 S가 경영을 담당하기로 했었고 수익 모델에 대한 부분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 S가 선뜻 이야기를 꺼냈다. '기업들한테 100만 원씩 가입비를 받자.'


무슨 말도 안 되는 수익모델인가 싶었다. 대체 얼마나 벌려고 100만 원씩을 받으려는지. S가 가져온 말도 안 되는 수익 그래프를 보며 나는 제발 이러지 말자고 했지만 S는 막무가내였다. '100만 원이 어때서? 카카오도 3년은 돈 못 벌었어. 형이 조급한 건 알겠는데 우리 좀 멀리 보자 형.' 멀리 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게 내 인생을 바쳐가며 해야 하는 사업의 규모라는 게 절망스러웠다. 그리고 그 절망은 본선 전날 밤에 폭발했다.


20131130_051731.jpg 밤새워가며 수익모델을 수정해야 했다.


K 이사님이 수익모델을 살펴보시더니 코웃음을 치셨다. '나랑 지금 농담 하자는 거냐? 이딴 거나 만들어 왔으면 나 너네랑 같이 하자고 안 했어. 너네 지금 소꿉놀이하자고 모였니?' 본선 전날, 멘토와 함께 숙소에 머물며 발표를 준비하고 다음날 아침에 발표하는 것이 순서였다. 그 숙소에서의 일이었다. 장장 한 시간을 깨지고 난 뒤 우리는 이 수익모델을 당장 수정해야 했다. 밤을 새워가며 엑셀과 싸웠다. 그렇게 발표 3시간 전. 이만하면 된 것 같다는 K 이사님의 말과 함께 나는 간단한 샤워만 마치고 에너지 드링크 하나 마시면서 단상 위로 올라갔다. 결과는 말할 것도 없었다.

1385781966134.jpg 상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리고 내 삶은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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