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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짝 Sep 25. 2019

90년대생의 얘기를 왜 자꾸 80년대생에게서 찾는가

실제로 90년생이 어떠한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먼저 나는 지금 90년생이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사람들이 실제 90년생이 어떠한가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심도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또는, 그들은 90년대생 중에서도 자기가 원하는 이야기를 해줄 몇몇과 교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 내 주위의 80년대생들은 그렇게 꼰대가 아니라서, 젊으신 분들이 왜 자꾸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지 의문이다. 나이가 40, 50인 분들도 그런 소리를 안 하는데.


일전에 세상의 나쁜 개는 없다에서 강형욱이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강아지를 자기 편할대로 대하고, 강아지의 불편을 무시하다가, 강아지가 짖고, 이상 행동을 보여서 자기가 불편하기 시작하면 그때서야 문제를 해결하려고 든다고. 사람은 강아지가 아니지만, 나는 90년생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가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90년대생은 내내 90년대생으로 있어왔는데, 갑자기 밀레니얼 세대니 뭐니 하면서 라벨을 붙이고 분석해보자고 자리를 깐다.


딱 90년생이라면 대졸자 기준으로 이것저것 시간 걸리는 걸 빼고 회사를 최소 1년, 많게는 4,5년도 다녔을텐데, 이제서야 얘기가 나오는 것도 좀 희안하긴 하다. 왜, 어떻게 컨트롤 하려고 했는데 잘 안되었나? 그래서 분석이 필요해진건가? 아니면 이제 회사에 92,93,94도 들어오기 시작하니까 인원이 많아져서 분석이 필요해진건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이제서야 뭐라도 좀 이해를 해볼 필요성을 느꼈다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그런데 이 분석이라고 하는 게, 헛다리를 짚어도 이렇게 짚을 수가 없다. 현상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니 다 잘 아는데, 그 원인이라고 짚어내는 게 너무 생뚱맞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아~ 요즘 애들 우리 때랑 달라~’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현상에 대한 분석을 지나 결론에 다다르면, 90년대생 입장에서는 황당할 정도다.


예를 들어서 <90년생이 온다>에서는, ‘90년대생은 강한 통제 방식에 반발을 느끼며, 권리를 지키고 행사함으로써 존재감을 확인하고 사고와 행동의 자유를 누리고자 한다’라고 말하는데, 맞는 말이다. 그러나 ‘왜’가 틀렸다. 이것은 90년대생의 특징이 아니고 원래 사람이 그렇다. 80년대생들도, 분명 그런 연수 과정에서 기분이 나빴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래도 동기애도 느꼈고 보람도 있었냐고 말할 이유가 있었다. 그걸 거치고 버티니까 뭐라도 결과물이 나왔으니까. 연차가 쌓이고 연봉이 오르고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으니까. 결과가 좋으면 과거는 좋은 추억이 되니까.


90년대생은 지킬 게 자기 권리밖에 없으니까 권리를 소중히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네 권리다, 라고 배웠던 것 만큼은 지키고 싶다. 그렇게 구르면 무슨 보상이 있나? 미래가 있나?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바치는 것은 미래가 있을 때 이야기다. 확실한 것은 불안정성 뿐이다.  


숙련되기 전에 팀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바라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정욕구 때문에? 뭐라도 포트폴리오에 채울 건덕지가 없으면 이직할 때 쓸 게 없어서다. 회사에서 10년 20년 생각하면서 회사 안에서의 꿈을 갖지 않는 것과, 팀 내에서 빨리 중요한 역할을 하기 바라는 것은 사실 원인이 비슷하다. 왜? 뒤쳐지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


이직을 해야 연봉이 오른다는 건 요즘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실이다. 한 회사를 10년 20년 다니게 회사가 두지도 않고, 그렇게 쉼 없이 오래 회사를 다니지 못할 정도로 업무량이 과도하기도 하다. 이직을 한다고 한들 직장생활을 할 수 있는 시기 자체가 길지도 않다. 어차피 오래 다니지도 못할 회사, 미래에 대한 준비는 결국 집단 밖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회사의 성과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 성과가 중요하다. 대기업 잘렸는데, 커리어 꼬였으면? 내가 막상 할 줄 아는 게, 한 게 없으면? 그걸 누가 책임져주나?


그러니 결론에서 90년대생의 흥미를 이끌어야 한다, 목표를 제시해야 한다는 말들은 그래주시면 좋지만 그게 해결책은 못  된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그것이 90년대생에게 미래를 주는가? 90년대생을 각자도생으로 밀어넣지 않는가? 회사에서 목표 제시를 아무리 한들 내 손에 쥘 것이 없으면 똑같다. 흥미는 있지만 미래가 없다고 느끼면 그 역시 똑같다.


여기서 또 한마디가 더 나왔다. 90년대생은 능력에 따른 공정한 대우를 원한다는 것이다. 박원익(박가분)씨와 조윤호씨가 쓴 <공정하지 않다>이다. ‘무임승차론을 말하는 평등의식이 가장 높은 세대’라고 하는데, 주변에 정말 그런 90년대생이랑만 놀았든가 아니면 주위에 90년대생이 없는데 에타랑 스랖만 들여다보고 썼든가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읽고 심상정씨가 ‘오늘 청년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놀란다’라고 추천사도 써 주었는데, 사실 이 책이야 말로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원인이다. 90년대생중에 누구라도 이거 아니라고 좀 얘기를 해야겠어서.


이 책에서 말하는 90년대생의 공정은 거칠게 두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ㅅㅂ 실력으로 따지면 내가 저새끼 바르는건데 저새끼가 부모를 잘 만나서...’ ‘너는 끕도 안 되는게 왜 여기 있어?’ 이 책에서 말하는 공정에 동의할 수 있는 사람은, 필드에서 경쟁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한정된 자원은 원래 소수에게 쏠리기 때문에, 대부분의 90년대생들은 필드에 못 낀다. 하지만 <공정하지 않다>에서는 이들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즉 <공정하지 않다>에서 말하는 공정은 차별과 배제와 이기심이다. 사회의 책임을 개인에게 묻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자격이 없는 이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돈도 실력인 사회는 공정하지 않다. 물론 마지막에 쓴 돈도 실력인 사회는 공정하지 않다. 하지만 문제는 이들이 자기 돈은 못 본척 한다는 점에 있다.

자격이라고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대기업을 준비하기 위해서 들어가는 비용을 누구나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설령 그렇게 지원을 한들 채용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여성 지원자의 점수를 낮게 주는 것은 이들이 말하는 ‘불공정’에 들어가는가? 오히려 결과에 승복하라고 한다. 그것까지가 시스템이라고 하는 사람도 보았다. 대입은 어떠한가? 있는 집 자식과 없는 집 자식이 하는 경쟁이 정말 공정한가? 뭘 믿고 자기들은 공정하게 그 자리에 있다고 하는가?

사회의 책임을 개인에게 묻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하면서 개인의 사회적 영향력에 대해서 무시하고, 체리피킹을 하려는 태도가 ‘공정’인가? 그렇지 않다. 여기서의 공정은 ‘이 룰로 승부하면 내가 이긴다’에 가깝다. 차별과 배제와 이기심이다.


그런데 과연 이 책에서 주장하는대로, 이러한 ‘차별과 배제와 이기심’이 90년대생의 특성인가?


경쟁의 필드에 서지도 못한 90년대생의 목소리는 어디로 갔는가? 성차별을 비롯해 사회 이슈에 관심을 가지고 저소득층, 장애인, 아동의 인권에 대해 말하는 20대 여성의 목소리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미래가 보이지 않아서 불안한 것은 90년대생 누구나 겪고 있는 문제이지만,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방식은 서로 다르다. 스스로 더 많은 능력을 갖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동시에, 어떻게든 사회 구조를 바꾸어보려는 90년대생이 많다. 어째서 보수적인 20대 남성의 목소리만 이렇게까지 과대표 되는가? 90년대생이 다 그런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이 아닌가?


정치적 성향이 어느쪽이든 마찬가지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이런걸 바라니까 이렇게 해야한다고 하든, 요즘 젊은 애들이 이지경이니까 우리가 뭘 어째야 한다고 하든, 90년대생을 입맛대로 써먹으려는 목적에는 변함이 없다.


80년대생이 90년대생을 이해해 보자고 이런저런 프레임을 씌워대는 것은 나와 의견이 많이 다를 90년대생 남성들에게도, 나와 비슷한 90년대생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젊은 세대를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틀로 끼워맞추려는 시도이다. 지배하기 위해서, 입맛대로 통제하기 위해서, 필요할 때 동원하기 위해서다.


90년대생의 목소리를 들어야겠다면 90년대생에게 물어봤을 것이다. 그나마 본인과 비슷한 90년대생에게 이거 맞지? 하고 확인 받는 대신 다양한 90년대생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시도했을 것이다. 90년대생을 무슨 신인류 취급하는 대신 스스로를 돌아보았을 것이다. 저들이 괜찮지 않아하는 것들이 나는 왜 괜찮았는가, 내 손에는 무엇이 주어져 있었는가. 그것을 안 했다는 것은, 애초에 90년대생의 진짜 목소리를 들을 생각을 안 했다는 것이다.  


그런 이해 바라지 않습니다. 돈이나 주면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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