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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쟁이 Mar 05. 2023

산 자를 위로하는 방법(1)

나의 엄마(6)

슬퍼하는 것조차도 혼자서는 불가능할 때가 있다.
누군가 나를 대신해 버튼을 눌러주었을 때 비로소 소리 내어 울 수 있었다.


엄마의 죽음을 알리는 전화를 받고도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소리 내어 울기는커녕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따져 물었다.

너무도 말이 안 되는 비현실적인 일이라며 그럴 리 없다고 오히려 의사를 설득하려 했다.

분명 무슨 착오가 생긴 것이라 여겼다. 그래야만 했다.

'왜? 엄마가 왜? 우리 엄마가 왜 오늘???'

도무지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느릿느릿 방금 물린 저녁 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수세미에 세제를 꾹꾹 눌러 묻히고 박박 그릇을 닦았다.

'엄마에게 전화 한 번 해봐야겠네. 왜 지금이냐고...'


저녁 7시가 못되어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내가 짐을 챙겨 집을 나선 시간은 밤 9시 30분 무렵.

남편이 운전하는 차에 오르고 나서야 마음이 급해졌다.

모두들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겠구나.

내가 빨리 가야 엄마의 임종 선고가 이루어질 터였다.

나는 말이 없었고, 남편도 말이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무엇을 해야 하나...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처음 겪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하지만 모두가 겪는다 해서 감정을 비롯한 일연의 모든 과정이 수월하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고속도로를 내달리는 동안 무언가 일을 해야 했다.

앞으로의 일에 대해 누군가에게 물어봐야 했다.

3년 전 아버지를 여의었던 친구를 떠올렸다.

나의 오랜 친구... 밤이 늦었지만 전화를 걸었다.

"현정아, 좀 전에 우리 엄마가 돌아가셨대. 지금 대전 내려가는 길이야."

상황을 설명하면서 잠깐 울었다.

친구는 장례식장을 정하는 문제와 발인하려는 날짜에 화장이 가능한지 그리고, 모실 곳이 정해졌는지를 확인하라 했다. 더불어 영정 사진으로 사용할 사진이 있는지도...


나보다 2시간 앞서 먼저 출발한 남동생에게 연락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들도 일을 하고 있었다.

아빠와 함께 집으로 가 엄마의 사진을 찾고 있었다.

장례지도 정해졌다 했다. 집안의 선산으로...

선산....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화장 후에 땅을 파고 유골함을 넣어 매장한다 했다.

아빠의 확고한 뜻이었다. 하지만 내 기억으로는 엄마는 그곳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셨다.

엄마가 그곳에 계시게 되면 남동생이 집안일에 자꾸 매일 텐데.... 엄마는 그렇게 되는 것을 꺼려하셨다.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 당시에는 그것 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전혀 몰랐으므로...

(장례를 치르는 중에 알게 되었는데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납골당도 있었다. 나는 지금도 종종 그 편이 나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병원에 도착하여 엄마의 얼굴을 보고 한바탕 울음을 토해냈다.

눈을 감은 채 꼼짝하지 않는 엄마의 모습을 직접 보았음에도 설득력 없기는 마찬가지다.

의사는 임종선고 후에 사인에 대해 설명했다.

갑작스러운 패혈증이었다.

이제 엄마는 병실에서 장례식장으로 옮겨질 것이다.

아빠가 내게 카드 한 장을 건네셨다.

엄마가 병원 다니실 때 사용하시던 카드.

엄마 은행 계좌와 연결된 하이패스 카드였다.

엄마는 그 카드를 들고 그 큰 대학병원을 홀로 다니셨다.

접수나 수납을 위해 번호표를 뽑거나 대기하는 일이 없어 아주 수월타 하셨다.

여동생과 함께 수납을 위해 병실을 나섰다.

그때 한 간호사가 우리를 급히 불러 세웠다.

"저... 다른 분들 보니까 수납하시면서 사망진단서 미리 받아 두시더라고요."

"아... 네.... 감사합니다."

막 돌아서 가려는데 또다시 부른다.

"보통 10통 이상씩 떼시더라고요.

여기저기 많이 필요하실 거예요"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전혀 몰랐다.


수납과 사망진단서 발급 업무를 마치고 부랴부랴

장례식장으로 이동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이 낯설다.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간...

왜 우리가 이곳에 있어야 하나 우리 모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무도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 우리가 장례를 준비할 수 있었던 까닭은 '장례'라는 시스템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만일에 그런 제도가 없었다면 우리는 모두 망연자실 주저앉아 그 어떤 일도 할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시스템이 우리를 이끌었고, 우리는 그대로 움직였다.

식장을 정해야 했고,

영정 사진의 크기며 헌화를 할지 말지...

향을 피울지 말지 등등을... 정해야 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물었고

우린 구체적인 질문에 간단하게 답했다.

다만, 식장을 일반실로 할지 VIP실로 할지를 두고

아빠와 약간의 의견차이가 있었을 뿐이었다.

딱 1개 남은 일반실은 너무 작았다.

테이블 12개의 아주 작은 방이었다.

비록 우리가 경황이 없다 하더래도 엄마를 그렇게 보내드릴 수는 없었다.

우리 삼 남매는 어쩌면 우리 상황에 과하다 할 수 있다 손 치더래도 일반실보다 무려 4배 큰 VIP실에서

장례식을 치르기로 했다. 우리 가족은 모두 잔치하고는 거리가 멀다. 아이들 백일, 돌잔치는 물론이고 부모님 환갑, 칠순 잔치도 꺼려했다. 우리끼리 축하하고 기뻐하자라는 생각들을 했기에...

하지만 엄마의 마지막은 그래서는 안될 거 같았다.

그때 우리는 모두 알았다.

우리가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구나.

장례는 본디 산 자들을 위한 의식이다.


장례의 전반적인 사항들이 결정되자 곧이어 엄마를 안치실로 모셔야 한다고 했다.

잠시 후 엄마가 실려왔다. 그리고 안치실의 문이 하나 열렸다. 그 문에는 웃기게도 VIP라고 대문짝만 하게 쓰여있었다. 순간 '풉'하고 실소했다. 그리고 흐느껴 울었다.

평소 같으면 'VIP'니 '명품'이니 하는 말에 정색했을 나였다.

죽어서 VIP 대접을 받는 어이없는 상황이 웃프게도 다행이다 싶었다.

이렇게라도 '우리 엄마 VIP 대접받네.' 하면서 한참을 울었다.


새벽 2시 30분. 장례 전반에 대한 결정이 마무리되었다.

엄마는 마지막 가시는 순간까지

자식들을 염려하셨나 보다.

해 지고 달이 떠오를 무렵...

자신의 저녁밥을 아빠에게 권하여

남은 시간 허기지지 않도록 하시고...

자식들도 각자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끝냈을 시간...

아빠가 빈 그릇을 퇴식구에 가져다 놓으러 가신 그 시간...

엄마는 홀연히 눈을 감으셨다.

(그 뒤 간호사실에서 산소포화도에 이상을 느껴 병실로 달려왔다.)

엄마는 그렇게 3일장의 장례일 중 하루를 덜어 내셨다.


딱 하루 조문을 받기로 했다.



잠시 눈을 붙이러 아빠의 집으로 향했다.

분명 아침에 엄마와 함께 집을 나선 아빠는

엄마 없이 혼자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너무 당연하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보일러를 돌리고 두꺼운 이불도 덮고 양말까지 신었지만 내내 덜덜 떨렸다.



우리 엄마 좋아하시던 목련. 오늘 보니 봉우리가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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