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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쟁이 Mar 13. 2023

산 자를 위로하는 방법(2)

나의 엄마(7)

한 달을 훌쩍 넘기고서야
엄마의 옷장을 열었다.
다행이다.
엄마의 옷장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화려했다.
우리가 사드린 적 없는
다소 생경한 옷들도 있었다.

어디에서 사셨을까?
 동생과 함께 입어보며 박장대소했다.

일부 몇 벌은 올봄에 내가 입기로 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열어 본
엄마의 옷장은
차라리 내게 위로가 되었다.


이른 아침 여섯 시 삼십 분.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모바일 부고장을 꼼꼼하게 살폈다.

잘못 기재된 곳은 없는지...

상주 명단에 빠진 사람은 없는지.

그리고 상복으로 갈아입고 아침을 먹었다.

슬펐다.

음식물을 목구멍으로 넘기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빠는 육개장에 밥 말아 한 그릇 뚝딱 비우셨다.

그런 아빠가 그때는 미웠다.

옆에 계셨음에도 엄마를 지키지 못하셨고

그러고서도 매끼 식사를 하시는 아빠가 그때는 미웠다.

얼굴을 마주하기 힘들었다.

한참을 울다가도 아빠가 우시면

그 모습이 가식적이라 생각되어

화들짝 놀라 눈물이 쏙 들어갔다.

동생들에게 혹여라도

아빠를 원망하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미리 일러둔 나였지만 정작 내가

그런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물론 엄마의 죽음이 아빠의 잘못은 아니다.

다만, 아빠는 감정 표현이 서투르셨고 두서없으셨다.

그래서 때때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장례를 치르는 내내

아빠의 슬픔은 위로받지 못했다.


부고를 알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친인척들에게 소식을 전하는 것은 많은 분들이 도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지인들에게 알리는 것은 망설여졌다.

내 엄마의 죽음을 팔고 싶지 않아서였다.

내 엄마의 죽음이 그들에게 민폐이고 싶지 않았다.

각종 미디어를 통해 부의금이나 축의금 등의

부당함을 토로하는 이야기를 충분히 들었던 터라

그 비난의 행렬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 아이 돌잔치 대신에 그만큼의 예산을

영아원에 기부했었다.

사랑스러운 아가를 보면서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아가들도 사랑받아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한 아가들이 너무도 가슴 아팠다.

그래서 여러 해 동안 인연을 맺어 후원했더랬다.


생전의 엄마도 우리와 다르지 않으셨기에

망설이고 망설여 나와 동생들은

조심스럽게 부고를 알렸다.


오전 10시 30분.

입관이 진행되었다.

엄마를 보는 마지막 순간이다.

수의를 입은 채 누운 엄마.

큰 소리로 울며 매달리면 일어나실 것만 같았다.

장례지도사들이 관속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몸을 단단하게 묶자

여동생이 소리 지르며 울었다.

"언니, 어떡해. 저거 우리 엄마 너무 싫어하는데.

답답해서 싫어하는데... 어떡해... 언니..."


다행이었다.

우리 삼 남매의 슬픔은 음식물은커녕

물을 삼키는 것조차 힘들 만큼 깊었지만

엄마의 두 사위와 며느리는 우리보다는 나았다.

그리고 성인이 된 손주 셋.

그들은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의

자잘한 일들을 묵묵히 해내고 있었다.

그들이 있어 우리 삼 남매는 맘 놓고 슬퍼할 수 있었다.

입관식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조화와 조기가 식장 주변을 에워쌌고

아이들은 연신 사인을 해주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수령증에 사인해 준 거였다.

내가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살폈을 때는

식장 입구는 물론이고

긴 복도 양옆이 하얀 꽃으로 가득 채워져

다른 길목으로까지 꽃을 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오후 3시.

엄마의 지인들이 찾아왔다.

나도 잘 아는 분들이다.

엄마가 사십여 년 가까이 다니셨던 교회의 친구분들.

목사님도 함께 오셨다. 예배가 진행되었다.

현재의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30년 가까이 기독교인으로 살았다.)

하지만 그분들이 너무도 반가웠다.

엄마는 오랜 시간 교회에서 봉사활동을 하셨다.

코로나19가 극성이던 몇 년을 제외하고

새벽기도도 거르지 않으셨다.

어쩌면 그분들이 엄마에게는 자식보다 친근했을게다.

자식들은 고작 일 년에 몇 번 얼굴 보는 게 전부이지만

그분들과는 일상을 함께 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 벗이었다. 엄마의 벗.

그러고 보니 나도 삼십여 년 만에 뵙는 분들이다.

모두들 머리 희끗희끗하시고 주름지셨다.

다들 노인이 되셨네.

나는 한 분 한 분 부둥켜안고

딸이 엄마에게 안겨 울듯 엉엉 울었다.

"경아야... 경아야... 애썼다... 엄마가 네 얘기 많이 했어."

그들은 나를 끌어안고 내 등을 쓸어주셨다.


엄마의 부고장은 흡사 나비와 같았다.

훨훨 날아 꽃에게 닿았고 꽃은 또 다른 나비를 불렀다.

그리고 그 나비는 또 다른 꽃에게로 향했다.

아주 오랜 시간 소식이 끊겼던 분들이

어찌어찌 알게 된 부고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오셨다.

오랜 시간 파킨슨 병을 투병 중인 육촌 오빠는

가족들의 부축을 받으며 조문을 오셨다.

병이 짙어 표정조차 어눌해진 오빠는

어눌한 말투로 천천히 애도를 표하셨다.

엄마의 소식을 듣고 경련을 일으키며 구토를 하셨단다.

그래서 모시고 오지 않을 수 없었다고...

새 언니가 상황을 전했다.


작은 아빠가 오셨다. 이십여 년 만에....

그리고 작은 아빠의 두 아들... 내 사촌동생들과 함께.

아마 삼십 년은 되었지 싶다.

할머니 돌아가시고 그 이후에 작은 아빠는 이혼을 하셨다.

(전적으로 작은 아빠 잘못이다. 이혼하면서 작은 엄마는 아직은 어린 두 아들의 양육권을 챙기셨다.)

사촌동생들에게 작은 엄마의 연락처를 물었다.

장례 후에 통화했더니 역시나 작은 엄마가 두 동생들을 보내신 거다.

큰 엄마 장례식장에 꼭 가야 한다고....

엄마 생전에 작은 아빠는 엄마를 힘겹게 했던 이들 중 하나였다.

나에게는 박하사탕 사 주던 친절한 삼촌이었지만...

작은 아빠에 대한 묘한 양가감정이

작은 아빠를 끌어안게 만들었다.

원망과 반가움이 뒤섞인 울음이 터져 나왔다.

작은 아빠도 그런 나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꺼이꺼이 우셨다.


저녁 무렵이 되자,

이 끝에서 저 끝이 아득하리만치 커다란 홀이

손님으로 가득 찼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믿기 어려웠다.

여수에서, 인천에서.... 전국 각지에서

저마다 다양한 인연으로 닿아진 엄마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1남 5녀의 장녀인 올케의 가족들은

사돈어른을 비롯하여

아장아장 걸음마하는 어린 조카들까지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대가족을 이끌고 우리를 찾아주었다.


조문 행렬은 자정을 넘긴 시간까지 이어졌다.


한 없이 작아져 볼 품 없어진 노구가

하얀 꽃이 줄지어 늘어선 복도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빠는 흐느껴 우셨다.

슬픔과 고마움이 마구 뒤섞인 울음이었으리라.

 

지난 2월까지는 완성하려 했으나 어쩔 수 없이 미뤄진 그림책에 등장하는 나비와 고양이 성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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