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엄마(8)
슬픔은 자율신경의 소관이 아니었다.
방문을 지나다 문지방에
새끼발가락이라도 찧을라치면
즉각적으로 온몸을 꿰뚫어 훑는 통증.
'아앗!' 하는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고
그 자리에 주저앉게 된다.
붉은 열감 가득한 새끼발가락 여기저기를 살피며
눈물도 찔끔, 방바닥에 발을 딛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 쩔뚝거리겠지.
발가락 끄트머리에서 시작된 통증은
즉각적으로 뇌로 전달되었을 것이고
뇌에서는 가능한 한 빨리 뭔가 명령을 내리려 했을 테지만
반사 신경들은 그와 무관하게 빠르게 대응했던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눈을 뜨지 않는 엄마를 보았고,
더 이상 엄마의 호흡을 느낄 수 없었고,
더 이상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고,
이제는 관 속에 누우셨기에 만지는 것은 고사하고
다시는 그 모습을 볼 수 조차 없음에도
통곡할 수 없었다.
왜냐면 잘 모르겠더라.
내 처한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더라.
여긴 어디인가?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둥실둥실 구름 위를 떠 다니는 듯도 했다.
어디까지를 인정해야 하는지
술 한 모금 삼키지 않았음에도
자꾸만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그렇게 장례식 절차의 마지막을 향했다.
도우미 분들이 차려 낸 아침 식사의 반찬이
별로 없다며 투덜거린다.
(전날 많은 조문객들 탓에 음식이 별로 남지 않았나 보다.)
그래서 누군가는 누가 사다 놨는지 모르겠을 사발면을 뜯었다.
아빠는 여러 번 데워진 탓인지 육개장이 맵다 하셨다.
'밥이 넘어가나 보다. 그래 산 사람은 살아야겠지.'
남동생은 화장장으로 가는 길 그리고, 선산으로 가는 길
버스 안에서 먹을 술과 음식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왜? 술이 필요하신 분은 따라오시지 말라 그래."
아빠도 준비해야 한다고 하신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
모든 장례 절차는 엄마의 뜻을 따라
기독교 식으로 치르기로 했다.
그런데, 왜?
다행이다. 알아보니 화장장에는 식당이 있단다.
식사가 필요하신 분은 대접해 드리면 되겠구나.
나는 엄마와 함께 하는 마지막 그 길이
맑고 깨끗하기를 바랐다.
2월 7일.
아직은 차가울 만도 한데 하늘도 맑고 볕도 좋다.
화장장 앞 작은 동산 기슭에
고양이 두 마리가 쪼그려 앉아 볕을 즐기고 있다.
지금 사는 아파트 말고 주택에 사셨을 때
엄마는 집 마당으로 찾아오는 고양이들에게
먹을 것을 내어주셨다.
그래서일까.
그들이 엄마를 배웅하려나보다 했다.
감사하게도 엄마의 오랜 벗들이
화장장까지 동행해 주셨다.
엄마 역시 몇 번이고 불렀을 찬송가를 불러주셨다.
나는 엄마 없이 불려지는
그 노랫소리에 자꾸만 눈물이 났다.
이제 정말 마지막인가 보다.
엄마의 관이 불길 속으로 뻗은 화로를 따라 들어간다.
내 몸속 어디에 그런 소리가 숨어 있었을까?
그 뿌리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가늠할 수 조차 없는
어마어마한 괴성이 내 두개골을 관통해 정수리로 뿜어져 나왔다.
얼마나 울부짖었을까? 머리가 뽑혀 나갈 듯 아파왔다.
서 있을 수도 앉아 있을 수도 없다.
땅속으로 꺼지는 것만 같았다.
내 엄마가... 내 엄마가… 정말로…가시나보다.
난 엄마를 의지하지 않았다.
나의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 부탁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바랐다.
내 엄마가 늙고 병들었어도
그냥 그 자리에 진정 계시기를 바랐다.
엄마는 누군가의 짐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지만
나의 짐이 되어도 좋으니
그 자리에 오래오래 존재해 달라 부탁드렸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엄마는 몇 개의 뼛조각으로 상자에 담겨 나왔다.
유족들에게 이를 확인케 하고
가루로 빻기 위해 다시 가지고 들어갔다.
그들이 다시 나왔을 때는
엄마는 유골함의 하얀 종이 봉지 속의 가루가 되어 나왔다.
우리는 다시 버스에 올랐다.
문중의 선산으로 간다 했다.
엄마가 사셨던 대전을 벗어나 고속도로를 탔다.
그리고 차들이 드물게 다니는
굽이굽이 시골의 좁은 도로를 아슬아슬 지났다.
버스에서 내려 나지막한 언덕을 향해
길이 나지 않은 산길을 걸었다.
걸으면서 자꾸 뒤돌아봤다.
자꾸 울음이 났다.
여동생의 손을 꽉 잡았다.
"경미야, 우리 여기 찾아올 수 있는 거니?"
흐느끼는 내게
여동생 역시 흐느끼며 말했다.
"응, 찾아올 수 있어 언니.
내가 구글맵에 다 표시하고 있어."
지금이라도 돌이킬 수 없을까?
몇 번이고 망설이고 망설였다.
차라리 그 먼 곳에 엄마를 묻고 오느니
우리 집에 모셔두고 싶었다.
엄마는 당신 죽으면 어디에도 묻지 말라 하셨다.
비석도 세우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 하셨다.
찾아오려 애쓰지도 말라하셨다.
그냥 산천에 뿌려 달라 하셨다.
훠이훠이 날아갈 테니...
그 무거운 이야기를
내가 단호하게 잘랐다.
"엄마, 불법이야. 요즘은 못 뿌려... 추모공원에 모실게."
엄마를 유배 보내 듯 낯선 땅에 모시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참으로 무거웠다.
아빠의 뜻인데...
이를 거스르면 혹여 불화가 될까 싶어...
나 하나만 참으면 넘어가는 일인데 싶어...
쓰디쓴 약 삼키듯 억지로 삼킨 일이었다.
이 일은 결국 잘못되었다.
한 달이 훌쩍 지나고서야 알았다.
우리는 개장을 결정했다.
돌아오는 4월 말 즈음에 개장을 하려 한다.
(개장을 하려면 다시 재화장을 해야 한다.
지금은 윤달이라 전국의 모든 화장장의 예약이 꽉 찼다.)
우리가 엄마를 모셨던 그 선산은
묘지로 허가받지도 신고하지도 않은 곳이었다.
한마디로 불법이었다.
이 이야기는 따로 그 과정을 자세히 적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