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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쟁이 Mar 27. 2023

산 자를 위로하는 방법(4)

나의 엄마(9)

어쩌면 우리 모두는 알고 있었다.

엄마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음을...

나날이 야위어 가는 몸과

현저하게 줄은 식사량

그마저도

소화시키지 못해 힘들어하셨다는 것이

그 징후였다.


그래도 아직은 그럴 리 없다며 손사래 쳤다.

힘겹게 버티고 계셨지만

의연하셨기에

앞으로 두어 번의 봄은 더 맞이할 수 있을 거라는

오만한 믿음을 품었다.


그럼에도...

마침내 그날이 오고야 만다면

분명 충분한 시간이 있어

마지막 인사를 넉넉하게 할 수 있을 거라 장담했다.


그런 믿음에도 엄마는

저만치 다가 온 새 봄이

미적거리는 겨울 때문에

주저할까 싶어

그만하고 빨리 가자  재촉하듯

겨울과 함께 서둘러 가셨다.

일 년 중 가장 밝은 달빛을 초롱불 삼아

우리에게 '안녕'이라는 인사도 없이

바삐 가셨다.


엄마 가고, 겨울이 간 자리에

봄이 왔다.

새초롬한 산수유 꽃이 풀빛 품어 노랗게 피었고

하얀 목련꽃이 탐스러이 빛나더라.

노오란 병아리 마냥 개나리 꽃도

야단법석 지저귈 테고

좀 있으면 산마다 진달래 분홍꽃으로

온 산이 서러워질 터이다.


유난히 꽃을 좋아하셨던 엄마.

나는 장례를 치른 이후부터 지금까지

엄마의 영정 사진 앞에 꽃을 보낸다.




장례를 치르고

찾아주신 분들께 일일이 전화를 드렸다.

감사한 마음을 담아 선물도 보내드렸다.

우리 엄마였다면 분명 그리 하셨을 거 같아

엄마의 마음이 되어 고개 숙여 인사드렸다.


매일매일이 눈물로 시작해서 눈물로 끝났다.

그렇게 여러 날을 보내고 나서야 알았다.

가장 힘든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제서야 알았다.

엄마의 부재를 가장 뼈저리게 느낄 이는

말로만 듣던 '독거노인'이 된

나의 아빠라는 사실을.

장례식장 내내 애써 외면했는데

결국은 마주하고 말았다.

너무너무 슬퍼하는 자식들 때문에

당신의 슬픔은 위로받지 못했다.

오십 년 넘게 함께 했던 반려자의

생명이 꺼져감을 목도했던

한 늙은 남자의 슬픔은 위로받지 못했다.


우리는 부랴부랴

아빠 홀로 살게 될 아파트에

홈캠을 설치했다.

충격을 이기지 못해

혹 나쁜 마음을 품지 않으실까 하는 생각 때문에.

아빠 핸드폰의 위치 추적은 이미 남동생이 해 놓은 상태였다.

여러 해 전 아주 작은 실수를 하시고

지레 겁먹은 아빠는

이상한 편지만을 남긴 채 사라지셨다.

온 집안과 온 동네가 발칵 뒤집어졌다.

그때 해 놓았던 위치 추적이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눈이 밝지 못하신 아빠를 위해

여러 물품들에 매직으로 큼지막하게 이름을 적었다.

"샴푸", "로션", "물비누" 이런 식으로...


냉장고 안의 음식들을 비웠다.

상한 음식을 드시고 탈 날까 싶어...

우리가 없어도 스스로 식사를 챙기실 수 있도록

주방 물품들을 사용하시기 편하게 정리했다.

반찬은 형제들이 번갈아 채우기로 했다.

다행히 아빠는 엄마를 많이 도우셨던 탓에

어느 정도는 집안일에 익숙하셨다.

평소 술, 담배를 하시지 않는 점도 안심이 되었다.


엄마 생전에 함께 다니셨던 병원을

이제는 엄마 대신 자식들이 함께 동행해야 한다.

최근 검사받으셔야 하는 사항들이 많아

거의 일주일에 한 번씩은 대학병원 진료를 위해

내가 대전에 내려간다.

5월에는 조직 검사도 예약되어 있고

(엄마 사후 아빠도 조금은 나빠지셨다.)

거의 감기다시피 처친 눈꺼풀을 올리는 수술도 예약되어 있다.


말동무도 없이 줄곧 혼자 계실 아빠를

설득하고 또 설득해서

주민복지센터의 "서예반"에 등록시켰다.

(따로 배우지는 않았으나 혼자 붓글씨를  계속 쓰셨다.)

주민복지센터의 담당자와 여러 번 통화해서

함께 하시는 분들의 연배와 선생님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 '독거노인'이 된 아빠를 부탁했다.

다행히 담당자분이 아빠에게 직접 전화해서 열심히 독려했고

아빠는 기분 좋게 첫 수업을 다녀오셨다.

일주일에 두 번 수업을 가시는 날에는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 30분까지 내내

그분들과 함께 서예를 하신다.

우리는 집에서도 편히 쓰시라고

큼지막한 책상과 편한 의자를 마련해 드렸다.

그동안은 거실 바닥에 신문지 깔고

허리를 구부린 자세로 쓰셨다.

 

엄마가 한사코 마다했던

'안마의자'를 설치해 드렸다.

170cm 키에 50kg 초반의 깡 마른 아빠는

종종 다리가 시리다 하셨고 쥐가 나셨다.

몸으로 버틴 고단한 삶이었으니

허리의 통증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도 자식들 돈 쓰게 하는 것이 못마땅한 엄마는

그런 거 필요 없다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아빠도 그런 거 없어도 된다 하셨지만

막상 사용해 보시고는 좋다 하신다.

하루에 2번 안마의자에서

편히 쉬시는 아빠의 모습을 홈캠으로 바라보며

진즉 해드릴걸 하는 후회를 했다.




엄마는 혹여 아빠 홀로 남게 되면....

하는 걱정이 많으셨다.

아빠 때문에

자식들이 힘들어질까 걱정하셨다.

'다 늙어 자식들 힘들게 하면 안 되는데...

해준 것도 없는데 짐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셨다.

그래서였을까?


엄마 사망신고를 할 때

'안심 상속 원스톱 서비스'라는 항목에 체크했었는데

그 결과가 놀라웠다.

엄마가 약간의 돈을 모으신 것은 알고 있었다.

엄마는 그 돈으로 병원비도 감당하셨고 생활비도 감당하셨다.

그리고 뜬금없이 용돈이라며 자식들에게

30만 원씩 계좌에 입금도 하셨다.

일부러 은행까지 가셔서...

(요즘 시스템은 노인들에게는 너무 어렵다.)

가끔은

'내가 죽으면....' 하고 운을 떼시고는

통장을 보여주신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외면했다.

"그걸 왜 보여주세요? 그 돈 다 쓰시고 가세요."


엄마 가신 뒤에도 엄마의 옷장이나 가방을 열어 보지 못했다.

통장을 찾아보는 일은 더더욱 싫었다.

남동생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요지는 자신이 엄마의 가방과 옷장을 대강 확인했다 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마다 쓰셨을

엄마의 기도문 노트를 자신이 챙겼다 했다.

그리고 통장들 일부도 봤노라 했다.

"누나 너무 많아..."

 그 말을 하면서 동생은 울었다.

그래서 그랬다.

"알고 있어. 많이 있어.

그러니 그 돈으로 아빠 챙기면 돼."


한참 후에야 나는 동생이 많다고 한 돈의 규모를 알게 되었다.

내 예상보다 세 곱절은 많았다.

(소위 가진 사람들이 말하는 많은 돈의 규모와는 다르겠지만.)

동생들과 이 사실을 공유하면서

동생들은 오열했고 나는 성을 내었다.

"아니 이 양반이 뭐 하신 거라니?"


1944년 태어난 내 부모(두 분이 동갑이시다)는

가진 거 없고 배운 거 없어

평생 몸으로 사셨다.

가난한 형편에 자식 셋을 낳아

쌀독에 쌀이 떨어질까...

행여 자식들 곯릴까 염려하며 사셨다.

공사판에서 다쳐도

병원은커녕 일을 공치게 되는 것이

더 걱정이셨던 분들이셨다.


어찌 되었건 돈을 남기셨으니 기쁘지 않냐고?

동생들은 서로 그 돈을 받을 수 없다 울었다.


결국 내가 독하게 마음먹고 제안했다.

사회에 기부할 것이 아니라면

각자 얼마씩 나누어 받아서

아빠 챙기는 데 사용하라고...

돈처럼 간사한 것이 없으니

아빠를 살피는 일도 어느 순간 버거워질 것이라고.

그러니 각자의 방법으로 아빠를 챙기는 데 사용하라 했다.

그리고 돈의 일부는 별도 계좌에 관리하기로 했다.

아빠의 생활비를 보내드리는 것과 병원비 등의 감당을 위해서.


동생들과 약속했다.

이다음에 아빠를 보내드릴 때에는

"아빠 안녕~!" 하고 보내드리자고.

'연명치료거부 사전 의향서'를 작성하셨음에도

우리는 엄마의 뜻에 반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달라

의료진들에게 매달렸다.

그게 마지막 가시는 엄마에게

고통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우리 욕심에 엄마를 붙잡으려 매달렸다.

"우리... 아빠에게는 그러지 말자."


다행히...

동생들과 한마음이었다.


그래서... 알았다.

우린 참으로 복 받은 사람들이란 것을...

그리고, 우리 엄마도 참 복 받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아빠 수술 예약을 하고 올라온 날 밤 꿈에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돌아가시고 처음이었다.

"경아야, 올라갔니? 너 힘들어서 어쩌니."

눈을 떴을 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엄마, 애쓰셨어요.

살아내시느라...

그리고 저도 잘 살아낼 거예요.

또한

그동안 애쓰신 아빠의

마지막 남은 시간들.

그 시간이 얼마일지 모르겠으나

잘 챙겨 보내드릴게요.


  

이 기억은 소멸되지 않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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