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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쟁이 Apr 25. 2023

엄마가 돌아왔다

나의 엄마(11)

"처음부터 이리로 오시지
뭐 하러 산에 들러 오셨대요."


모든 절차가 끝난 후

'공설봉안당 사용 신고증명서'를 내게 건네던 직원이

답을 기다리지 않는 질문을 한다.

아마 '고생 많으셨죠?'라는 인사였을 것이다.

나는 빙긋 웃었다.

'이 증명서를 받을 수 없었거든요. 그곳에서는...'



매장신고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난 다음 날

우리 삼 남매는 즉시 개장하기로 결심했다.

당연히 아빠에게도 이 사실을 알렸다.

애초 나는 올 가을쯤을 그 시기로 생각했다.

아빠의 병원 진료 예약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고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기에

좀 뒤로 미루고 싶었다.

그런데... 막내가 울더라.

"언니, 우리 엄마 그곳 흙 되기 전에 빨리 데려오자."

이 말에 나는 즉시 오케이 했고

전화 통화를 끝내자마자

바로 절차를 확인했다.

우선 대전의 추모공원에 문의했다.

아뿔싸! 우리 엄마는 '관외사람'이 되어 있었다.

결혼 후 평생 대전에서 사셨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셨던 엄마는

한 달여의 외출로 '관외'로 분류되었다.

그래도 대전에서 사셨기에

그곳에 들어가실 수는 있었다.

다만 비용은 관내로 분류될 경우와 비교했을 때

두 배 정도 더 지불해야 했다.


구체적인 절차는 이러했다.

'개장신고 -> 화장 -> 추모공원에 모시기'


개장신고는 개장을 결심한 당일 처리했다.

물론 신고 과정의 어려움은 있었지만...

원칙적으로 개장신고는 묘지 토지의

소유권자가 하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엄마는 선산에 계셨고

선산은 개인이 소유한 토지가 아니었다.

문득 '임야대장'을 열람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문중소유로 '소유권보존등기'가 되어있었다.

나는 이 일을 우리 선에서 해결하고 싶었다.

집안의 다른 이들과 의논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를 모시고 나갈 수 있을 때까지 어떤 시비에도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담당자와 통화했다. 그간의 사정을 말하니

담당자는 내가 열람한 '임야대장'과 '묘지 사진'을 첨부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했다.

담당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여러 번 했다.


두 번째 절차 '화장'.

엄마는 이미 화장된 유골로 유골함에 담겨 묻혔다.

그럼에도 추모공원에 들어가려면 무조건 재화장을 해야 한다.

아마도 그 이유는 '해충방제'일 것 같다.

해야 한다면 하면 그만이다.

문제는 화장장 예약이 하늘의 별따기라는 것.

우리가 개장을 결심한 때는 이미 '윤달'에 접어든 시점.

한시라도 바삐 서두르고 싶었지만 일단 멈춤이다.

전국의 화장장이 이미 '예약 만료'이다.

윤달을 벗어나면 해당일로부터 15일 전 예약이 가능하다.

3 월지나 4월이 되었다.

점점 예약 가능한 날이 가까워졌다.

매일 아침 예약 상황을 살폈다.

이를테면 4월 6일(목요일) 자정이 되는 시점에서

2주 뒤인 4월 20일(목요일) 화장장 예약이 가능하다.

며칠 동안 추이를 지켜본 결과

화장장 예약이 쉽지 않겠구나 하는 불안함이 들었다.

모두들 윤달이 끝나면 화장장 예약이 쉬울 거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동생들에게 사이트를 확인해 보라 했다.

동생들 역시 급 불안해졌다.

(개장이고 관외라 더욱 그랬다.)


그래서... 화장장을 대전으로 국한하지 말자.

선산이 있는 익산시를 포함하여 세종시, 군산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자.

드디어 D-day

4월 8일 밤 11시 30분

형제들 모두 'e하늘장사정보시스템'에 접속했다.

우리는 마지막 단계만을 남겨 둔 채로 시간을 기다렸다

심지어 사위들과 며느리까지...

각자 지역을 달리해서 예약을 준비했다.

드디어 4월 9일의 시작을 알리는 "자정"

예약은 30초 만에 모두 만료되었다.

지역에 따라 10초 만에 만료된 곳도 있었다.

마지막 코드를 입력하려는 순간 끝나버린 곳도 있었다.


다행이다. 여럿이 함께 나서니 가능하구나.


4월 23일 오전 10시 30분 익산시 정수원으로

최종 결정하고  나머지 예약들은 즉시 취소했다.


그리고 지난 일요일

엄마를 대전시립추모공원 제3봉안당에 봉안했다.

당초 추모공원 자연장지에 잔디장으로 모시려 했었다.

하지만 모시기 이틀 전 최종 확인을 위해 추모공원에 문의했을 때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지금 엄마를 잔디장으로 모시면

아빠 사후에 합장이 불가하다는 것.

자리를 미리 예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설마다 상황이 다를 수 있다)


4월 들어 아빠는 우울해하고 우시는 날이 많았다.

핸드폰을 집에 놔둔 채 집을 나가시기도 했고

집에 설치된 홈캠을 끊어버리기도 했다.

엄마 영정 사진 앞에서 당신도 데려가라고,

살고 싶지 않다고 소리치셨다.  

끝내 남동생과 반목하는 일까지...

그 상황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나였다.

"아빠, 엄마 모시러 가는 날 아빠는 가지 마세요."

"왜?"

"엄마가 반기지 않으실 거 같아요."

아빠가 흐느끼시는 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다.

"엄마가 생전에 늘 안타까워했던 아들이잖아요.

구호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며칠 내내 애 전화도 받지 않고 서운케 하세요? 말실수 좀 했다고... 그래도 곧바로 죄송하다 했잖아요."

나는 야무지게 엄마를 대신해서

조목조목 아빠에게 따졌다.

"그래, 내가 나가 죽으면 그만이다."

"아빠 그렇게 죽으면 엄마 옆에 묻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 내가 막을 거예요. 왜요? 죽어서도 엄마 괴롭히시려고요?"

아빠의 울음소리만 들려왔다.

"홈캠 원래대로 해 놓으세요. 그거 구호가 아빠 염려되어서 해 놓은 거예요.

그 애 마음이에요. 그러니 아빠가 복구해 놓으세요."

나는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곧 여동생에게 전화해 상황을 전했다.

일 하러 나가기 전 아빠에게 들러 잘 달래라 했다.

그러나... 여동생이 아빠 집에 갔을 땐 아빠는 이미 집을 나가고 없었다.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채...

여동생은 인터넷 공유기의 전원 플로그를 꽂고

아빠가 숨겨 놓은 캠 하나를 찾아 안방 화장대 밑에

숨겨 설치해 두고 집을 나왔다.

그 정도만 해두어도 도어록 여닫힘 정보를 알 수 있어 안심이 된다.


한참 후...

'도어록 여닫힘'정보가 올라왔다.

아빠가 들어오신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더 지났을 때

나는 안방의 상황을 살폈다.

화장대 앞에서 불안하게 서성이는

아빠의 두 다리가 보였다.

스피커를 켰다. 종잇장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종잇장을 들었다 놨다 뭔가 곤란한 일이 생긴 모양이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아빠에게 전화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태연하게...

오전에 아빠에게 했던 독한 말은 다 잊은 척...

"아빠... 점심 드셨어요?"

"응.. 먹었지." (사실 아빠는 요 며칠 식사를 거르셨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응... 그냥 걸었어."

"어딜요?"

"대전역까지 그냥 걸었어."

"꽤 되는 거린데. 다리 아프지 않으세요?"

"쉬엄쉬엄... 쉬면서 걸었지 뭐.

근데... 경아야,  KT에서 뭐가 왔다! 난 모르겠어"

"그래요? 그거 저녁에 경미 보고 들어가서 봐 드리라 할게. 거 봐 홈캠 있으면 아빠가 그거 들고 앞에 서 계시면 봐 드리잖아 불편하죠?"

사실이었다. 화상통화를 가르쳐 드렸지만 잘 못하셨다.

때문에 홈캠은 여러모로 유용했다.

택배로 식료품 등 여러 물건 보내드리면

아빠는 캠 앞으로 와서 보여주셨다.

냉장보관인지 냉동보관인지 나는 상세하게 가르쳐 드렸다.


"아빠, 이번 주에 엄마한테 가고 싶으시죠?"

"가야지..."

"그렇죠? 그러니까 오늘 구호가 전화하면 받으세요!

꼬옥? 올케도 많이 힘들어해. 애들이 너무 걱정한다니까. 그렇지 않아도 한희 군대 가서 여러 가지로 마음 쓰이는데..."

"나도 한희 군대 가서 서운해서 그랬어..."

"맞아. 그랬을 거야. 우리 이번 주에 엄마 좋은 곳으로 잘 모셔요. 그리고, 내일 엄마 생신이야. 내가 정신없어서 꽃 못 보냈잖아요.경미가 내일 사 올 거야. 아빠가 예쁘게 꽃병에 꽂아 놓으셔"

되었다. 이쯤에서 되었다.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음을 알렸다.

그리고 더불어...

더 이상 그 누구도 아빠로 인해 상처받지 말라고...

안타깝게도 우리 아빠는 이제 그런 존재가 아님을...

평생의 반려자를 먼저 보내고 홀로 남은

쪼그라든 늙은이임을 알렸다.

그러니 '아빠가 나를 서운케 했어.' 이런 생각하지 말라 했다.

이제는 우리가 아빠의 남은 삶의 울타리가 되어 주어야 한다고... 우리가 어느덧 아빠 삶을 배웅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음을 알렸다.

얼르고 달래며 말 벗 해드리자고 했다.

멘털이 종잇장인 남동생에게 특히 더 세세하게 일렀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 여동생이 보낸 톡.

'괜찮니? 위로가 안 되겠지만... 그냥... 같이하자.'


아...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나는 또 놀랬다. 뭐지? 분명 홈캠 정상인 거까지 확인했는데 그 뒤로 뭔 일이 또 생긴 거야?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지만 여동생에게 전화했다.

"경미야. 무슨 일 또 생겼니?"

"아니, 언니 고생했다고... 고맙다고...

난 아빠 무슨 일 생길까 봐 정말 무서웠거든."

어휴... 이게 술 먹고 저런 톡을 한 거다.

제발 맨 정신으로 말해라.

얘는 요즘 술 마시면 운다.

갑상선항진에 췌장 용종도 있어 정기 검진받는 애가.

그렇게 한 시간을 막내랑 통화하면서 얼르고 달랬다.



합장이 불가하다는 말에 당황해하는 나에게

추모공원 담당자가 제안했다.

"봉안당에 모실 수 있어요. 그리고 아버님 사후에 함께 합장하시면 됩니다."

"개장유골도 가능한가요? 그럼요. 15년 봉안하실 수 있습니다.

15년 모시는데 비용은 40만 원입니다."

그래서 애초의 계획과는 다르게 잔디장이 아닌 봉안당으로 모시기로 했다.

아빠에게도 이 사실을 알렸다.

"아빠, 엄마가 15년 더 기다리신대. 그러니 15년 더 사세요."

"어이구, 그럼 100살 가까이 살라고?"

"네... 그래봤자 95세네. 요즘은 다들 그리 산다잖아요."


좋았다.

엄마를 엄마 사셨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모실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잠시 집 떠나 있던 엄마가 다시 돌아오신 거 같아 참 좋았다.


엄마를 모셨다. 두 분이 함께 찍은 마지막 사진도 함께... 엄마 이제 자주 갈게요.


 

바쁘고 정신없지만 여전히 그림은 나의 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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