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종화 Jul 23. 2020

꽥!

 아름다움과 질투, 고전적이지만 강렬한 욕구에 대한 작은 우화.

무성한 잎을 머리에 인 푸른 나무들이 미지근하게 덥혀진 여름바다처럼 출렁이는 7월이었다.

시골 마을 옆 작은 산 건너 한적한 숲 속에 연못이 하나 있었다. 매미들의 울음소리에 귀가 먹먹 해지는 수면 위로 창포와 개연꽃이 크고 작은 잎들을 드리우고 군데군데 모인 갈댓잎들은 언뜻 봐도 성인 여자 키만큼 자라 있었다.

한 달 전쯤 두 쌍의 오리들이 이 갈대 잎들 사이에 둥지를 틀었다. 짝짓기를 마친 이들은 가족을 꾸리기 위해 90km가 넘는 먼 거리를 비행해 비슷한 시기에 이 곳에 정착했고 연못을 중심으로 각각 동쪽과 서쪽 끝 언저리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았다.

그들은 몸집과 생김새가 유사했다. 집오리보다 조금 작은 몸집에 명도의 차이는 있으나 전체적으로 갈색의 깃털로 둘러싸여 있다. 부리가 노란빛을 띠는 것도 같았다. 다만 네 마리 중 수컷 한 놈만 유독 눈에 띄게 밝고 화려한 깃털과 생김새를 자랑하고 있었다.



먼저 도착한 암컷 오리(A)는 산란 후 처음으로 둥지를 나와 혼자 연못을 둘러보고 있다. 연못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아름다웠다. 연못을 둘러싸고 있는 수없이 늘어선 느티나무들은 냇가에 자신들의 무성한 머리카락을 가닥가닥 풀어헤쳐 수면 위에 아무렇게나 흩뿌리며 물속 생물들에게 시원한 쉴 곳을 마련해주고 있었다. 오렌지색의 잉어 서너 마리는 뜨거운 햇살이 산산이 부서지는 수면 위로 흐릿한 실루엣을 띄우며 한량처럼 배회하고 있었다.

이 모습을 바라보며 A는 생각했다.

‘꽤 순조로운 출발이야. 처음엔 못 미더워 보여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막상 이렇게나 괜찮은 곳을 찾아낼 줄이야. 뭐 생김새가 좀 거시기하긴 하지만 이만하면 성공적인 짝짓기야.’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때 또 다른 암컷 오리 (B)와 마주쳤다.

B가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B: 어머, 안녕하세요!

A: 아 네… 안녕하세요

B: 이 연못에 저희 말고 다른 오리가 있는지 몰랐네요. 정말 반가워요. 새로운 곳에서 동족을 만나는 건 늘 반가운 즐거운 일이죠.

오신지 얼마나 되셨어요? 저흰 한 달쯤 되었어요… 아 그럼 저희랑 비슷한 시기에 오셨구나~? 어머, 저보다 언니시네요? 앞으로 언니라고 불러도 괜찮죠?


그녀의 첫인상은 한 번도 구겨진 적 없는 매끈한 종이 같았다.

종이는 한두 번 접히고 구겨져도 다시 펼 수 있다. 하지만 한 번도 그런 적 없었다는 듯 구겨지기 전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주름살처럼 구겨진 모양대로 잔상이 남기 마련이다. 어려서부터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수없이 접히고 밀쳐지고 구겨져 본 자는 그렇지 않은 자를 보면 단박에 알 수가 있다.  


“언니, 이 연못에 오리라곤 저희 가족이랑 언니 가족뿐인 것 같아요, 우리 친하게 지내요. 새끼들 어느 정도 크면 다 같이 연못 밖에 구경도 가면 좋겠네요 그렇죠?.. 그러니까요, 맞아요. 언니, 며칠 내로 한번 또 봐요 우리. 네 언니, 살펴가요”


친근함을 표시하기 위해 제자리를 빙글 한 바퀴 돌며 돌아서는 B를 뒤로하며 A는 멀찌감치 B의 둥지를 훔쳐보았다. 5미터 남짓 떨어진 거리에서도 B의 수컷은 엄청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황금빛을 띠는 녹색 머리깃털은 정오의 햇살 아래 발광하고 있었고 가슴엔 고급스러운 자줏빛 밤색 깃털들이 촘촘히 박혀있었다. 등은 밝고 화사한 회색을 띠고 꼬리 중앙에 솟아오른 검은색 깃털 한 가닥은 과거 유럽 어느 궁중 귀족의 뾰족한 신발 끝처럼 우아하게 위로 말아 올려져 있었다.

B의 둥지 또한 굉장해 보였다. A의 그것보다 두 배 차이가 날만큼 넓었으며 어떤 적이 침범해와도 거뜬할 만큼 튼튼해 보였다.


자신의 둥지로 돌아온 A는 모든 것이 달라져있음을 깨달았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충분히 넓다고 생각했던 둥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비좁고 불결해 보였다. 돌아온 어미를 보자 입부터 벌리고 보는 새끼들의 재잘되는 울음소리에 머리가 아파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건 그녀 자신의 짝이었다. 처음 봤을 때도 별 볼 게 없던 수컷은 장기간의 비행과 끊임없이 먹이로 채워 넣어야 할 입들이 생긴 이후 더더욱 볼품없는 행색을 하고 있었다. 둥지를 조금이라도 깨끗하게 해 보려 애써봐도 그때뿐, 커가는 새끼들에 비례해 둥지는 점차 비좁아져만 갔다. 수컷은 전과 다름없이 저녁만 되면 새끼들과 암컷을 위한 먹이를 잡아 날랐지만 A는 점차 수컷이 곁에 오는 게 싫어졌다.


A는 B와 비슷한 모양새가 갖고 싶어 안달이 났다. 자신보다 훨씬 밝은 갈색인 B의 깃털이 자신의 짙은 고동색 깃털보다 더 우아하고 기품 있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작년 가을철 비행 때 보았던 밀밭과 같은 색상이야. 참으로 아름답지 뭐야.'


처음 깃털을 뽑을 때는 눈물이 찔끔거렸다. 그러나 며칠 동안 행위가 계속되자 아픔도 익숙해져 갔다. 빼곡했던 깃털이 빠져 하얀 속살이 드러날수록 A의 모양새는 이상해졌지만 스스로 보기엔 썩 괜찮아 보였다. 수컷은 그녀의 이런 행동에 우려를 표했지만 A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거의 매일 B의 둥지 주위를 배회하며 그녀와 그녀의 아름다운 수컷을 훔쳐보았다. 깃털을 잃어갈수록 A의 환상은 커져갔다.



B를 처음 만난 지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이른 저녁이었다. A는 여느 날처럼 먹이를 잡아오겠다는 핑계를 대고 둥지를 나와 B의 둥지로 향했다. 수면 위에 비친 깃털이 제법 없어진 자신의 허전한 옆구리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유유히 갈퀴질을 하던 그때 갑작스레 들려오는 B의 비명소리와 물살을 가르는 거친 소리에 놀란 A는 급히 몸을 숨겼다. 자신을 숨겨준 수풀 사이로 멀찌감치 B 가족의 모습이 보이고 멀리서 왜가리가 엄청난 속도로 그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어린 새끼들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B가 갑자기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새끼들과 반대 방향으로 황급히 헤엄쳐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무리로부터 떨어졌다 싶은 순간 B는 갑자기 무언가에 공격을 받은 듯 아니면 몸 어딘가가 불편한 듯이 첨벙 대며 위태롭게 허우적거렸다.

어느새 수면 위에 올라타 새끼들을 향해 헤엄쳐가던 왜가리는 B의 절규 소리에 고개를 돌리더니 저울질 끝에 B를 향해 방향을 전환했다. 연약한 새끼들을 타깃으로 하자면 수컷 오리를 상대해야 하는데 그럴 바엔 부상 입은 어미 오리 한 마리를 해치우는 것이 손쉬워 보였으리라. 몇 분뒤 차마 듣기조차 괴로운 B의 처절한 울부짖음은 외마디 비명을 끝으로 그치고 왜가리는 오싹한 두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유유히 연못을 떠나갔다.


공포에 질린 A는 황망함과 공포에 커진 동공으로 자신의 둥지로 돌아와 새끼들과 수컷을 돌아보았다. 이윽고 식구들이 안전한 걸 확인한 후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하.. 이를 어쩌나.. B가 참 안됐어.. 아니지, 이래서 귀하게만 자란 오리들은 세상 물정을 모른다니까. 털갈이도 마다하고 자기 깃털만 중한지 아는 철부지를 수컷으로 들인 게 잘못이지. 옛말에 모름지기 깃털 세는 수컷 치고 개구리 잡는 놈 없다는 말도 있잖아. 그나저나 그 많은 새끼들은 다 어쩔꼬.. 쯧쯧'

A는 끌끌 혀를 차며 새끼들의 몸에 붙은 물방개며 작은 이파리들을 부리로 쪼아 먹어치웠다.



그로부터 며칠 뒤 A는 B를 잡아먹은 바로 그 왜가리에게 잡아먹히고 말았다. B의 수컷과 그 새끼들을 살필 겸 먹이 사냥을 핑계로 홀로 밤에 나왔다가 변을 당한 것이었다.

왜가리를 발견한 A는 물속에선 승부가 되지 않겠다고 생각했고 날갯짓을 해보았으나 그동안 뽑아낸 깃털의 양이 꽤 되었던지 날갯짓이 무색하게 물 위로 추락하고 말았다.




2020년 여름.

손바닥 수업의 결과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