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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름 Feb 27. 2018

취준생에게 전하는 말 몇 마디

따뜻한 말 한마디는 지옥에 있는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다

 한 가지 먼저 고백하자면. 나는 취업 준비라는 것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대학교 졸업 전부터 스타트업을 동업하게 되었고 (창업멤버 비스무리하게) 스타트업을 그만두고 난 뒤 다른 곳, 또 다른 곳에서 쉴 새 없이 스카웃과 이직을 해왔다. 엄청 좋은 곳들이냐고? 돈을 많이 주는 회사였냐고? 딱히 그렇진 않다. 하지만 내 스스로가 생계 부양자였기에 절대로 월급이 끊겨서는 안 될 상황이었고, 그렇기에 지난 몇 년간 나는 꽤 운이 좋았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이, 언니오빠들이, 서서히 동생들이 취업준비를 한다고 했을 때 이해는 십분 했지만 완벽하게 스며들지는 못했다. 이 기회에 용서를 빌고 싶다. 모난 마음을 가진 친구들이었다면 내가 얼마나 얄미웠을까. 똑같은 어려움과 시행착오를 겪긴 했지만, 난 이미 월급생활자로써의 첫 스타트를 무난하게 끊었으면서 저 멀리에서 재잘재잘 힘을 내라고 메아리나 던지는 격이었으니.

 그러던 도중 싱가포르로 취업을 하기 위해 건너오며 사상 처음, '취업 준비', '구직', '면접 준비' 등의 낯선 단어를 온 몸으로 체감하게 된다. 70개의 기업에 지원했고, 7개의 기업의 서류전형에 통과하여 면접을 보았으며 세 군데의 기업에 최종합격을 했다. 한국에서 다니던 기업을 호기롭게 그만두고 2개월 가량의 공백기를 가진 동안. 

 나는 태어나 한번도 맛본 적 없던, 데여본 적 없던, 꿈도 꿔본 적 없던 지옥을 체험했다. 

60번이 넘는 탈락과 무시, 거절 속에서 나는 별별 괴랄한 심적 고통을 다 받았다. '난 안 될꺼야', '지금이라도 한국으로 돌아갈까?', '다른 친구들은 이미 좋은 직장에서, 혹은 괜찮은 곳에서 커리어를 안정적으로 쌓아가고 있는데 난 여기서 뭐하는 거지', '나 다 망한 것 같은데 이제 어떻게 해야할까. 정말 망했다. 이건 진심으로 망했다.', '다시 태어날까','엄마 미안해','그 때 나 붙여준 회사 갈 걸' 등등. 

자기혐오라는 최악의 우주 속에서 등대처럼 나를 지켜준, 나를 포기하지 않도록 만든 JJ언니의 말들이 있다. 지금 도움이 필요한 작은 존재들과 나누고 싶다.


 어느 날 부엌에서 처량하게 라면을 끓이고 있을 때였다. 장난처럼, 진담 한 스푼을 푸욱 넣고 읊조렸다.

"언니, 전 안 되려나봐요. 전 가진 게 없거든요. 그냥 나이만 조금 어리다뿐이지. 사실 20대 초반, 중반에 비하면 나이도 많지만. 하긴 뭐, 안 될 팔자에 스펙이긴 하죠."

언니는 눈을 부라리며(죄송해요 언니. 이 표현 말고 더 적확한 표현이 없네요.) 말했다.

"야, 네가 없는게 뭐가 있어. 난 보이는데? 네가 가진 많은게."

"네? ........전 아무것도 잘난 게 없는데요. 학벌도, 돈도, 배경도, 언어 능력도, 좋은 경력도, 자격증이나 스킬 같은 것도."

"넌 그렇게 생각할 지 몰라도 내 눈엔 보여. 너는 모르는 네가 가진 너무나 큰 능력들이. 이 세상에서 너만 볼 수 없는 너라는 사람이 가진 대체불가능한 능력이. 이렇게 많은데, 안되긴 뭐가 안 되고 없긴 뭐가 없어. 넌 돼."


 언니를 처음 만난 날이었다. 내가 당했던 이러저러한 억울했던 일, 위험했던 상황, 혼자 타지에 혈혈단신와서 겪었던 별별 사건들과 이상한 녀석들을 얘기했다. 언니 특유의 성난(?) 위로를 받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받은 문자. 너를 만나서 반가웠고 또 보자^^ 식의 말보다 진한, 누구보다 깊고 투박한데 요상하게 세련된 문자였다.


'집에 가는 길이니? 잘 가고 있지? 너 오늘부터 싱가포르에 언니 생겼어. 그러니까 이제는 무서워하지 마. 아무것도 무서워 할 일 없어 이제부터. 그러니 어깨 펴고, 오늘 밤부터는 편히 잠들 수 있을 거야. 조심히 가구.'


"야, 난 너가 00회사 될 것 같다."

"에? 갑자기 왜요?"

"그냥. 넌 스타트업 경력도 있고, 방실방실 잘 웃고, 예의바른 태도도 좋고 성격도 둥그러니 좋고. 너를 안 뽑을 이유가 없잖아."

"에이. 뭐에요. 그런 건 별 것 아니잖아요......글쎄요, 웃는거야 뭐. 천성이 그런거고. 성격 나쁜 사람보단 좋은 사람이 많죠, 사회생활 하다보면. 가식적으로라도 착한 척 하는 사람도 많고. 제가 그렇게 인성이 천사처럼 좋은 사람도 아니고."

"너 그거 아니? 내가 다국적기업 매니저도 해보고 싱가포르에서 십몇년을 살면서 깨달은 게 있어. 실력? 경력? 그거 별거 아니야. 가르치면 돼. 그딴건 괜찮은 애 뽑아서 가르치고 갈고 닦으면 되는 거야. 근데 태도가 안 되어 있다? 가르쳐 줄 의향도 없어지고, 본인도 배울 의사가 없어. 그럼 어떻게 되겠어. 서로 망하는 거야. 내가 널 좋아하는 이유는, 실수도 많이하고 아직 모르는 것도 더럽게 많지만 내가 한 번 일러주면 그걸 그대로 배워서 흡수하는 거야. 넌 태도가 되어있어. 내가 면접관이라면 난 경력 많고 태도 똑바로 안 되어있고 잘난 맛에 사는 애보다 난 너 같은 애를 뽑을 거다. 그런 애는 가르치면서 같이 끌고 갈 수 있거든."


테이블을 차리고, 접시에 담아 먹은 후 설거지 하기 귀찮아서 서서 부엌에서 김치국을 냠냠 먹으면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언니는 인상을 또 찌푸리더니 성큼성큼 걸어왔다.

'야, 난 너 그렇게 먹는 거 마음에 안 들어. 그렇게 서서 먹지마.'

'왜요? 전 이게 편해서 좋은데!'

'아니야. 네가 아무리 지금 뭣도 아닌 것 같고 신분도 불안정하고 미래가 불확실하다 해도 이거 하나는 기억해. 넌 대접받을 사람이야. 넌 공주야. 그러니 너 자체를 하녀 취급하지마. 뭐 하나를 먹을 때도 확실히 예쁜 그릇에 담아 먹고 테이블에 앉아서 반듯하게 먹어. 넌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서서 급하게 먹고 그러지 말고, 어딜 가서라도, 누군가를 만나더라도, 뭐 하나를 할 때도 네 존재를 충분히 존중해. 넌 너희 부모님이 수십년간 사랑으로 애지중지 길러낸 공주님이니까. 알겠지?'

'네.'


'세상에는 될 애가 있고 안 될 애가 있어. 안 될 애는 정말 뭘 해도 잘 안돼. 안 풀리고. 그냥 운도 없고, 그런거지. 근데 넌 잘 될 것 같은데, 난? 진짜. 다 될거야. 왜냐면 너는 될 애니까. 그것만 잊어버리지 마라. 아 참. 그리고 부정적인 말에는 힘이 있어. 그러니 절대 '난 안 될 것 같아요, 망했어요, 그냥 포기하려고요' 이 따위 말 하지마. 될 놈은 된다는 데 넌 될 놈이야. 그런데 뭐 그리 걱정이 많아?'


 언니가 담배를 피우러 나갈 때 나도 졸졸 쫓아 나설 때가 있다. 담배를 피우지는 않고, 그냥 곁에서 수다도 떨고 앉아서 다람쥐랑 고양이 구경도 한다. 한창 면접에서 제대로 실수해서 떨어질 것 같다고 징징댔을 때였다. 조용히 얘기를 듣던 언니가 조금 슬픔에 젖은 눈을 한 채 담배 연기를 뿜으며 했던 말이 생각난다.

'내가 지금 매니저 위치가 아니어서 제일 슬픈 게 뭔지 아니?'

'음....... 어쩔 수 없잖아요. 지금 언니가 눈 높이 낮춰서 들어간 포지션은 사실 대학원 공부 병행하려고 하신거니까...... 그러니까, 음, 제 말은..... 음....... 연봉도 적고, 복지도 별로여서?'

슬픔이라니. 사실 잘 모르겠어서 아무 말이나 막 던졌다. 슬픔도, 절망감도, 뭐 기타등등 비슷한 카테고리의 우울한 부분 따위는 전혀 모를 것 같이 완벽한 인생과 커리어 위를 질주하며 사는 듯한 사람인데.

'그런 것도 그렇지만, 내가 예전처럼 높은 자리였다면 너처럼 고생하는 어린 한국 애들, 잘 모르고 나쁜 어른들한테 당하기만 하는 순진한 바보들을 더 잘 보듬어 줄 수 있을텐데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내가 너를 추천하거나 채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직접적으로 줬을텐데. 지금 내 코가 석자라 그런 걸 전혀 할 수 없으니까....... 그게 제일 사실 마음에 걸리고 좀 속상하네. 너를 지금 당장 뭐 어떻게 도와줄 수 없다는 게.'

'아니에요. 괜찮아요.'


라고 말은 했지만, 나는 이미 언니를 통해 도움은 충분히 받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차고도 넘치게. 넘치고도 흐르게. 말은 못 했지만. 언제나 감사합니다.


나의 꿈은 10년 후, 내가 충분히 성공하여 절실히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작게나마 구원하는 것이다. 몇 마디 단어, 한 마디의 문장은 누군가를 지옥에서 꺼내 천국으로 구원할 수 있는 충분한 마법이 있다. 말주변이 부족한 나는 그녀처럼 되기에는 아직 멀었다. 그래서 난 잔뜩 짓눌려져 있는 누군가의 기분을, 한숨으로 점철된 누군가의 하루를, 우울감과 불안감으로 패잔병 신세가 된 누군가의 오랜 나날을 단번에 구원해줄 수는 없지만. 연약하고 작고, 그래서 더 아름답고 강해질 날 밖에 남지 않은 당신이 이 글을 보며 기분이 나아지길 바라본다. 예전의 나처럼. 가식적인 위로보다는 투박하게 포장된 진심이 큰 힘이 되었던 여러 번의 낮과 밤처럼. 

 아, 그런데 만약 지금 당신이 충만하게 행복하다면? 내가 감히 그 행복에 한 술 정도 더 얹을 수 있었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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