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것 없는 해외취업자의 반추
싱가포르에서 일을 시작한 지 1주일 째다. 꿈(?)을 이뤘다기에는 거창하고, 목표를 달성했다는 말이 그럴 듯해 보이는 요즘. 나로 하여금 한국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했던 요인들을 짚어봤다.
여러 국적과 여러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친구로 많이 두었다. 운이 좋아서. 그런데 한국에서는 특정 인종과 함께 있으면 너무나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 내 에티오피아 친구 M은, 1997년 생으로 내가 졸업한 모교의 정규 학생이다. 가끔 이태원이나 녹사평 등지로 맛있는 걸 먹으러 우르르 몰려다니는 팸(?)의 멤버로 내가 아끼는 동생이다. 하루는 M과 같이 단둘이 밥을 먹으러 갔다. 처음이었다.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차원이 달랐다. 지하철의 모든 사람들이 갑자기 말소리를 줄이고 우리를 쳐다봤다. 그래, 어쩌면 내가 그렇게 착각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나를 그 정도로 착각하게 할 만큼, 노골적인 시선과 호기심 어린 눈을 하고 나와 흑인인 M을 아래 위로 훑는 사람들의 모습은 질릴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아직도 한국 사회는 폐쇄적이었다.
내가 카자흐스탄에 교환학생을 갈 계획이라고 대학교 수업시간에 털어 놓았을 때도 생각난다. 나는 그 곳에 가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리라고, 내가 보지 못했고 느끼지 못했던 것을 마주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설렌 상태였다. 그 때 수업을 함께 듣던, 친하지도 않았던 동기가 마구 웃기 시작했다. 영어를 배울 거면 그 딴 곳에 왜 가느냐고, 자기 같으면 이태원이나 가겠다고, 이태원에서 외국인 친구나 만드는 게 더 낫지 않겠느냐고. 나는 그 무례함에 충격을 받고 당황스러워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 후에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새로운 시도와 경험을 즐기는 사람들은 주로 ‘카자흐스탄에 교환학생을 다녀왔더니 어땠느냐, 신나는 모험처럼 들린다’며 말했지만 나와 케미스트리가 잘 맞지 않는, 오히려 외국에 다녀온 적도 없는 이들은 ‘그런 데는 왜 갔느냐’며 훈계를 일삼았다. 아, 주로 서양인들은 (프랑스인 제외) 카자흐스탄을 매우 흥미롭게 생각하며 그 곳에서 경험했던 이야기를 알려달라고 했고, 한국인들과 프랑스인들은 대부분 나라 이름만 듣자마자 비웃음거리로 삼았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난 그 곳에 간 게 내 인생 최고의 터닝포인트였는데 말이다.
성추행을 당해 경찰을 부른 적이 있다. 두 번. 옷차림? 무릎까지 오는 원피스를 입고 가디건을 걸쳤었다. 밤이었냐고? 낮 12시, 학교 수업이 끝난 후였다. 내가 술을 마셨냐고? 소주 한 모금은 커녕 더워서 비타민 워터나 마시면서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물론 범인은 잡지 못했다. 그 때 내 신고를 받고 출동한 네다섯 명의 경찰 분들은 나로 하여금 했던 얘기를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게 만들었다…... 여경 분은 늦게 도착을 했고, 범인은 잡지 못했고, 나는 집 앞 100m 앞에서 생긴 범죄 탓에 이틀간 집 밖을 나가지 못했다. 무서워서. 내 이웃인 그 범인을 또 만날까봐.
이유 없이 지하철에서 공격을 받은 적이 있다. 붐비는 퇴근길, 핸드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던 나를 향해 상대방은 전속력으로 달려와 나를 밀쳤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고, 나는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비실비실 일어났다. 그렇게 붐비는 시간이었지만 그 누구도 나를 위해 나서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사람들 틈 사이로 빨개진 팔과 얼굴을 가리고 몰래 숨어, 그 정신병자가 내릴 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그 남자는 날 밀쳐 넘어트린 후에도, 붐비는 지하철 객실에서 굳이 여자만 골라 힘껏 밀어 넘어지게 만들었다. 왜 그랬을까.
가장 친한 친구들 10명을 뽑아 봤을 때, 소위 알만한 대기업을 간 친구는 단 두명이었다. 나머지는 좋은 스펙, 훌륭한 인성, 알만한 학벌을 가졌는데도 자력으로 취업을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친한 오빠는 공기업을 가기 위해 2년 동안 취업 준비만 하고 있었다. 그가 면접에서 떨어진 다음 날, 난 이제 무엇을 할거냐고 넌지시 물어봤다. 그 오빠는 바로 그 날부터 다시 그 기업 입사를 위해 인적성 책을 사러 갈 것이라고 칼같이 대답했다.
중학교 때 친했지만 성인이 되고 사이가 멀어진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온갖 곳을 다 뜯어고치고 과할 정도로 성형을 한 뒤, 똑같이 생긴 여자들과 매일 밤마다 클럽에 간 사진을 SNS에 올렸고 나는 자연스레 팔로우를 끊었다. 함께 아는 다른 친구는, 그 아이가 스폰서가 있는 건지 의심스럽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비싼 술과 여러 여행지를 돌아다니는 그녀가 부럽다며 본인도 주기적으로 쁘띠 성형을 한다고 토로했다.
중학생 시절, 나를 괴롭혔던 아이가 있었다. 여러 아이들이 집단적으로 나를 1년 정도 따돌렸지만 그 아이가 가장 생각이 많이 난다. 그 아이는 펜싱부였고, 지금은 결혼 준비를 하며 임용 고시 준비를 한다고 수줍게 인스타그램에 적었다. 그 포스팅을 우연히 보게 된 후, 나는 충격에 빠져 잠을 못 잤다. 선생님이라니. 10년 전이었다. 같이 밥 먹을 사람도 없는 내게 욕을 하던 아이. 내 시계를 한번만 차겠다고 빼앗아 가놓고 다시는 돌려준 적 없던 아이. 엄마에게 생일선물 받은 거니까 이제는 돌려달라고 애원하는 내게, 그 시계는 잃어버렸으니 다시 하나 사라고 비웃던 그 아이가, 누군가의 사랑스러운 아내이자 멋진 선생님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예전에 다녔던 회사에서 손님이나 방문객이 오면 커피를 타는 것은 나 아니면 친한 동기 언니였다. 직급이 높으신 나이 지긋하셨던 분은 내 가족관계를 물었다. 엄마 아빠 및 나와 여동생, 이렇게 넷이라고 하자 아들이 하나도 없으니 우리 부모님이 밑지는 장사를 했다고 농담을 던졌다. 가끔 짓궂은 방문객들은 신입사원을 얼굴 보고 뽑냐면서 칭찬 아닌 칭찬을 했다. 업무와는 상관없는 잡일을 시키고,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고, 이런 일은 곧 끝날 테니 조금만 참으라고, 구인 중이지만 사람이 잘 구해지지 않는다고 우는 소리를 하면서 그들은 월 매출이 5배가 오르자 자식들을 한 달에 200만원 하는 영어 유치원에 등록했다.
동아리의 남자애들은 외모로 여자애들을 줄을 세웠었다. 그 누구도 원치 않았는데 말이다. 나와 친하지 않았던 어떤 오빠는 내게 ‘넌 ㅁㅁ이보다는 예쁘지만 00이보다 못생겼으니 화장을 좀 더 하고 다녀라’ 라고 가시 돋친 말을 했다. 장난이었는지, 진심이었는지는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누나, 살 좀 빼!’라고 하던 착하고 장난꾸러기 같던 동생이 있었다. 그 때 나는 일반 체중이었고, 굳이 따지자면 저체중에 가까웠으며 건강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말을 감히, 무슨 권리로 할 수 있었던 건지 묻고 싶다.
내가 겪었던 사소한 일련의 경험들이 누군가에는 낯익은 이야기일 것이다. 내가 일상 속에서 목도했던 한국의 수많은 병폐들은 지금도 현재진행중인 Struggle로 투쟁을 일으키고 있다. 노동 착취, 인종 차별, 성 차별, 음지의 성문화, 학교 폭력 등. 한국만이 문제라는 것이 아니다. 내 나라에 남아서 나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 질려버린 얼굴을 한 채 그 곳을 떠난, 한국을 포기한 내 문제도 있다. 소원이 있다면 우리나라를 더 좋게, 더 행복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것이다. ‘남의 불행을 원동력으로 삼아 하루하루를 버티는 나라’라고 묘사했던 장강명의 책, ‘한국이 싫어서’를 읽으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다시 한국에 돌아온다면 모두가 존중 받을 권리, 차별 받지 않을 권리, 다 같이 행복해질 권리를 위해. 작지만 흔들림 없는, 그런 목소리를 내고 싶다.